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택상 (문단 편집) === 대한민국기 ===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뒤에 그는 경찰로 근무한 경력을 살려 [[행정안전부장관|내무부장관]]에 임명됐으나 인선 과정에서 [[이범석]] [[국무총리]] 겸 [[대한민국 국방부장관|국방부장관]]의 실수로 [[외교부장관|외무부장관]]으로 나가게 됐다. 그러나 외무장관으로 임명되기로 했다가 내무부장관으로 임명된 [[윤치영]]과 서로 오해하면서 앙숙이 되어버린다. 게다가 정부 수립 이후 임명된 [[외교부 장관|외무부장관]] 자리의 경우 그닥 맞지 않았던 탓에 외무장관에 취임한지 반년만에 사표를 쓰고 나와버리고, 미군정기때 형성한 경찰 인맥을 이용해 은연중에 [[윤치영]]에게 엿을 먹이면서 경찰쪽에 끊임없이 입김을 불어넣기도 했다. 정부 수립 초기에 그는 이승만에게 건의하여 [[장건상]][*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일한 사람으로서 장택상의 12촌 형이며 서로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의 영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장건상의 회고[* 김학준 저, 혁명가들의 항일회상에 기록한 것에 의하면.]에 의하면 어느날 자신을 부른 장택상이 수도청에 앉아있다가 장건상 본인이 들어오자 감격받은 듯이 무릎을 탁 치며 "형님! 됐습니다!"라는 것이다. 장건상이 연유를 묻자 장택상은 장건상을 장관으로 임명하라는 이승만의 승인이 떨어졌음을 말했으나 장건상은 원래 복에도 없는 벼슬을 하고 싶지는 않다. 단독 정부는 [[민족]]을 분열시키는 것이니 참여할 수 없다며 거절 의사를 나타냈고 장택상은 이에 대해서 아쉬워 했다고 한다. 여운형의 [[근로인민당]]에서 활동하기도 한 장건상도 경상북도 칠곡군 출신으로 장택상과는 같은 [[항렬]]의 먼 [[친척]]이었다. 그래서 10년의 나이 차이에도 형과 동생이라 부르며 친하게 지냈다.[* 장건상이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자 장택상이 직접 축하 전보를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장건상은 여운형의 [[조선인민당]]과 근로인민당의 부당수 노릇을 하다가 여운형이 암살된 뒤에는 근로인민당의 당수로 남북협상에 참여해 [[평양시|평양]]을 다녀오기도 했다.] [[6.25 전쟁]] 중에는 [[조봉암]], [[신익희]]와 함께 이승만을 찾아가 수도 [[서울특별시|서울]]을 사수한다 해 놓고 피난간 것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으나 퇴짜 맞았다. 이승만 曰, "내가 [[당덕종]]이냐!"[* 장택상의 회고록-대한민국 건국과 나] 이후 [[이범석]], [[윤치영]], [[이기붕]]과 함께 이승만에 대한 [[충성]] 경쟁을 하게 된다. 장택상은 이범석과 함께 [[우익]] 청년 단체를 동원해 [[부산정치파동]]과 [[사사오입 개헌]]을 도왔으며 1952년 5월 6일부터 1952년 10월 5일까지 대한민국의 제3대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국무총리 재직 중에는 이승만의 지시를 받고 이범석의 제3대 [[대한민국 부통령|부통령]] 출마를 낙선시키기도 했다.[* 배후에서 조종한 것으로 이범석의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의 규모가 커지자 이를 경계한 이승만의 의도와 이범석, 윤치영 등 이승만의 강경파 측근을 이승만에게서 떼어 놓으려는 [[미국]]의 압력도 작용했다. 그러나 이범석이 쫓겨난 뒤 [[어부지리]] 격으로 [[2인자]] 자리는 이기붕이 차지했다. 이범석이나 장택상 중 2인자가 나올거라는 예상을 뒤엎고 최종적으로 살아남은건 허약하고 세력도 가장 약했던 이기붕이었던 것.] 이범석은 장택상을 경찰에 [[고소(법률)|고소]]했지만 경찰에서는 통할리도 없었다. 이범석과 [[조선민족청년단]]계는 그 뒤 장택상이 일제강점기에 경기도지사를 지낸 [[일본인]]을 [[부산광역시|부산]] 항구에서 우연히 만났다는 혐의로 "장택상은 친일파~" 라는 [[노래]]를 불러서 장택상을 낙마시켰다. 부연 설명을 하자면 당시만 해도 일본과 정식 [[외교]] 관계가 없었고 만났다는 혐의의 일본인이 조선총독부 고위 관리이다. 다만 이 사건은 진짜로 있었는지는 [[논란]]이 심하다. 장택상은 친일파~ 정도 노래가 아니라 '''장택상은 조선총독부 고관 아무개와 일본에서 회담해서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논의했다'''식의 이적 행위로 몬 것이다.[* 비슷한 류의 폭로가 신익희가 당시 납북돼서 [[북한]]에 체류 중인 [[조소앙]]이랑 [[인도]] [[뉴델리]]에서 만나서 중립화 [[통일]]을 논의했다는 [[뉴델리 밀회 조작사건]]이 있다.] 이승만의 장기 집권에 반발하여 훗날 [[민주당(1955년)|민주당]]으로 발전하게 되는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였다. 이 때 혁신계 정치인 조봉암의 호헌동지회 참여가 논란이 되는데 장택상은 [[절친]]인 조봉암을 적극 지지하였다. 하지만 반공 우익 성향이 강한 [[조병옥]], [[장면]], [[곽상훈]] 등의 맹렬한 반대로 조봉암의 호헌동지회 입성은 결국 좌절되었고 실망한 장택상은 다시 [[자유당]]으로 돌아갔다.[* 호헌동지회에서 배제된 조봉암은 무소속으로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서 무려 200만 표를 득표하면서 강한 인상을 남긴다.] 1959년 조봉암이 구속됐을 때 [[홍진기]][*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장인.] [[법무부장관]] 등에게 조봉암의 무고함을 설명했고 그를 변호하는 글까지 직접 작성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조봉암과 친분이 있었는데 장택상 자신이 [[UN]] 대표로 파견될 때는 [[가족]]들에게 내가 없는 동안 조봉암을 따르라 하고 출국 전에 조봉암에게 가족을 의탁하니 조봉암은 감동받았다 한다. 조봉암이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차마 이승만이 조봉암을 어찌 못할 것이라고 공언했지만 결국 조봉암은 사형되었다. 1958년 이범석과 손잡고 [[공화당]]이라는 [[정당]]을 만들려다 실패했으며, 1963년 9월 자유당을 재창당하여 총재를 맡았다. [[6.3 항쟁|한일협정 반대 시위]]에 [[윤보선]], [[함석헌]] 등과 함께 가담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칼럼과 회고록을 기고하면서 [[신민당(1967년)|신민당]] 고문으로도 활동했다. 1969년 7월 폐암으로 입원했으며 1969년 8월 1일 오후 7시 15분에 [[사망]]하였다. 사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수교훈장 광화장을 추서받았으나 건국훈장 서훈 대상에서는 제외되었다. 그의 유해는 1969년 8월 7일 [[국립서울현충원]] 제1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Die_of_Chang_Taek-sang.png|width=100%]]}}} || || {{{#c39335 '''△ 장택상 전 총리 장례식'''}}}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