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택상 (문단 편집) == 기타 == * 이상한 소문[* [[http://blog.daum.net/anti21/12263286|#]] 이 글에는 출처가 리영희의 저서라고 되어 있는데 리영희의 어느 책에도 이런 내용이 없다.]도 있지만 장택상은 독립운동가가 맞다. 다만 후에 [[노덕술]]을 중용한 것은 장택상의 비판점 중 하나가 되었다. 일화에 의하면 친일 경찰들을 등용하는 과정에서 그를 고문한 적이 있던 경찰도 등용했는데 경찰관은 자기보다 높은 자리에 앉게 된 장택상의 보복을 두려워했지만 장택상은 오히려 일제강점기 때는 어쩔 수 없었다며 직무를 수행하는 열의는 대단했다고 치하했다고 한다. * 파리에 있을 때, 중국의 [[주은래]]와 같은 하숙집에 살면서 극장에도 같이 다니는 등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주은래를 두고 "대단한 인물"이라 평했다고.[*출처 김영삼 회고록 1권.] * [[이승만]]과는 1919년 4월, [[필라델피아]] 제1차 한인대회와 구미위원부 시절부터 인연이되어 해방되고 경무국장 [[조병옥]]과 함께 수도경찰청장 직을 수행하면서도 좌우합작의 [[김규식]] 대신 이승만을 적극 옹호하며 네이션 빌딩에 동참했다. 그 후, 4번의 국회의원으로서 이승만과 협조하기도 때론 대립하기도 하면서 다사다난한 의정 활동을 벌였던 그는 인생 말년에 인터뷰에서 [[이승만]]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a 希望出版社, 《政界秘史 事實의 全部를 記述한다 : 歷代 主役들이 實吐한 未公開 政治裏面 秘史》, 1966, 希望出版社, p. 131] >이 박사는 애국자였다. 그의 애국은 거의 '''종교적 신조'''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 박사는 자기 조국을 비판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분의 사고는 '조국이면 그뿐이지 잘잘못 간에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br][br]나 자신이 이 박사를 소년 시절부터 모셔왔지만 ''''조선 사람은 할 수 없어.''''하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였다. 이것은 흔히 우리들 사이에 쓰고 있는 말이지만 이 박사의 사전에서는 그런 말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분은 이와 반대로 흔히 '외국 사람은 할 수 없어'하는 말을 많이 쓰고 있었다.[br][br]이 박사는 오락을 몰랐다. 주량은 물론이고 장기, 바둑 등 모든 실내 오락도 이 박사는 문외한이었다. 만일 그것을 오락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글 쓰는 오락은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 그것은 대부분 조국의 사정을 외국 정부나 정당인에게 알려주는 글이었다. 그분의 이 습성은 대통령이 된 후에도 쉴 새 없이 가지고 있어서 측근자들이 '이 박사의 타이프라이터는 단명'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a] *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에 재학 중인 [[김영삼]]을 발탁하여 정계에 입문시킨 것도 장택상이다. 1958년 공화당을 조직할 때는 [[김대중]]을 일시적으로 대변인으로 채용하기도 했다.[* DJ와 더불어 총리 재직 시절 김영삼도 발탁하였다. 이외에도 [[여운형]], [[이만규]], [[조봉암]]과 친하게 지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렇게 하여 [[김영삼]], [[이승만]], [[박정희]]가 셋이 서로 대립하는 사이가 되었으나 나중에 [[이회창]]이 당 총재가 되는 [[한나라당]]에 이르러서는 그 정당으로부터 [[국민의힘]]에 이르기까지 보수 제1정당에서는 저 세 사람 모두를 존경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세월이 흘러 [[3당 합당]]과 [[뉴라이트]]의 부상을 겪으며 보수정당에 셋의 지지자들이 모여 벌어진 일. * [[도자기]], [[그림]] 등 고미술품 수집이 [[취미]]였으며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것도 수준급이었다고 한다. * 1967년 당시 그가 가지고 있던 [[파텍 필립]] 시계는 국내 존재하던 [[시계]] 가운데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7100700099204004&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67-10-07&officeId=00009&pageNo=4&printNo=479&publishType=00020|가장 고가였다고 한다.]][* 1967년 기준 [[휘발유]] 1리터가 21원이었으니 당시 60만원은 요즘으로 치면 4,800만원 정도 된다. 현재 양산되는 [[IWC]] 시계의 국내 가격이 600~900만원 수준임을 생각하면 결코 만만치 않은 가격.] * 위의 이유에서인지 [[브루스 커밍스]]의 책에는 당시 미군정청 관리들의 평가를 인용해서 [[네로]]와 [[괴링]]을 합친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 홍덕영 옹의 증언에 의하면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아시아]] 예선 당시 [[대한축구협회]]장으로서 선수들에게 [[http://blog.naver.com/t016mm/120017756779|"일본에 지면 현해탄을 건너올 생각하지 말라."라고 했다고 한다.]][* 다만 이는 이승만의 의지가 강하게 들어간 것이기는 하다.] * "로맨스는 인생이요, 인생은 로맨스"라는 말을 남겨 당시에 큰 화제가 되었다. *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2번째 부인이었던 [[성혜림]]의 부친인 [[성유경]]과 먼 친척 사이였으며 친척이라는 인연으로 성혜림의 자매인 [[성일기]]와 만난 적도 있다. * 실제 [[성격]]은 아첨꾼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자존심이 대단했고 심지어 오만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대단한 명문가 출신이었다. 정체성은 사실 양반-귀족에 가까웠다.]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5동에 장택상의 [[별장]]이 있었다. 그래서 별장이 있었던 [[호암산]]이 '별장산'으로 불리기도 했었고 별장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빌라와 상점이 많이 있었다. 시흥계곡 복합환경생태공원에 별장터 안내 표지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