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헌명숙황후 (문단 편집) === 황태후 시절 === 건흥원년(1022) 2월, 진종이 붕어한 이후 13살의 조정이 황위에 올라 [[송인종]]이 되었고 유아와 숙비 양씨가 각각 황태후와 황태비가 되었다. 진종은 유서에서 태자에게 황위를 계승하고 정사는 황태후의 처분에 따르라고 당부했다. 반대파도 제거하고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유아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다. 한 예로 황제의 생일을 건원절(乾元節)이라고 하듯 유아의 생일은 장녕절(長寧節)이라 하고 황제의 생일과 똑같이 성대하게 치렀다. 거기다가 유아가 타고 다니는 수레인 대안련(大安㰈)은 명편시위(鳴鞭侍衛)가 마치 황제를 모시듯이 끌고 다녔다. 이때부터 유아는 황태후란 신분으로 대권을 손에 쥐고 조정을 쥐락펴락했고 신하들은 한 술 더 떠 유아에게 응원숭덕인수자성태후(應元崇德仁壽慈聖太后)라는 긴 존호를 바쳤다. 그리고 정적인 구준과 이적을 각각 뇌주사호참군(雷州司戶參軍)과 형주단련부사(衡州團練副使)로 좌천시킨 후, 자신의 측근이지만 권세를 마구 휘둘러 원성이 자자했던 정위와 뇌윤공(雷允恭)을 숙청목표로 삼았다. 어린 인종이 잠이 많아 조회에 매번 지각해 유아가 황제 대신 신하들에게 배알을 받자 정위는 여기에 반대했다. 또한 산릉사(山稜使) 진종의 침릉 축조를 하던 중에 산릉도감 뇌윤공이 임의로 황릉의 위치를 옮겼다. 이것만으로도 중대한 문제인데, 기껏 바꾼 위치가 땅을 파보니 지하수가 나오는, 장지로 쓸 수 없는 흉지였다. 이 문제로 유아가 뇌윤공을 처형하려고 할 때 정위가 뇌윤공을 두둔하며 명에 따르지 않다. 유아는 정위의 이러한 행적을 문제 삼아 신하들의 동의를 얻어 뇌윤공은 사형에 처하고, 정위는 애주사호참군(崖州司戶參軍)으로 좌천시켰으며, 그들을 따르던 관리들은 모두 조정에서 내쫓았다. 진종 후기에는 도교사원 건축과 제사에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여 재정난을 겪었다. 출신이 낮았던 유아는 하층민들의 고충을 잘 알았기에 나라를 안정시키고자 도교사원 건축과 불필요한 노역을 금지시켰다. 도교 사원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이고 사원에 바치는 공물도 금지하였으며 세금을 감면시켜주는 등 선정을 펼쳤다. 또한 왕증, 여이간, [[노종도]], 장지백과 같은 명신을 기용했다. 정무를 처리함에 있어서도 유아는 상당히 엄격했다. 하루는 유아가 조회에서 나라가 어려운 시기에 신하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며 감사를 표시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친족을 등용할 테니 자식과 친족의 이름을 쓰라고 하자 많은 신하들이 좋다고 이름을 올렸지만, 유아는 그들을 절대로 등용하지 않았다. 다만 유아의 전 남편인 공미가 세상을 떠나자 유아는 그의 장자 유종덕을 총애하여 그가 천거하는 사람들은 능력을 따지지 않고 기용했다. 유종덕이 24세 나이로 세상을 뜨자 유아는 그의 친척들을 관리로 등용했다. 또 공미의 사위인 마계량이 학식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시험관에게 대신 시험을 치게 해 그를 사관(史館)에 들어가게 했다. 이런 일련의 일을 가지고 시어사 조수고가 특별대우를 하는 것을 반대하자 그를 강등시켰고 그 후로는 반대하는 자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인종과 유아의 사이는 의외로 좋은 편이었다. 유아는 비록 인종의 권력을 통제했지만 인종을 억압하지 않고 수신과 치국에 도움이 되는 책을 읽도록 독려했다. 특히 효경(孝經)을 강조했다. 유아는 이런 식으로 인종과 관계를 잘 유지했다.[* 어쩌면 유아가 인종에게 이런 애정을 쏟았음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인종은 자신이 권력을 잡을 수 있게 했던 존재이자 방패막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유아에겐 다행히도 인종은 유아가 생모가 아님을 유아가 죽기 전까지 몰랐다.] 유아는 자신의 권력이 막강해지자 마치 무측천([[측천무후]])처럼 황제가 되고 싶다는 야망을 품었고, 신하들은 이를 경계했다. 이에 따라 '인종이 성년이 되었으니 이제는 어느 정도 잡무를 맡겨도 되지 않느냐.' 하는 상소가 올라왔지만, 유아는 그런 상소를 쓴 이를 지방관으로 좌천시켰다. 유아가 하루는 노종도에게 무측천에 대해 묻자 노종도는 질문의 의도를 간파하고 무측천이 당대의 죄인이며 그로 인해 나라의 사직이 지켜지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유아는 조정대신들이 모두 반대하니 자신의 뜻을 이루기는 어렵다고 생각해 황제에 대한 계획은 포기했다.[* 하지만 그래도 권력욕은 남았는지 태묘대전을 앞두고 유아는 천자의 곤룡포와 면류관을 착용한 채 제를 올리고 싶다고 했다. 이에 조정은 의논 끝에 신분이 불분명해진다며 반대했지만 그래도 유아는 고집대로 특별제작한 곤룡포를 입고 제례를 올렸다. 며칠 후에는 인종이 적전(籍田)에 가서 농사를 짓자 유아는 재상 장사손에게 <사태묘(謝太廟)>와 <궁경적전기(躬耕籍田記)>를 편찬하려고 명했지만, 장사손은 태후가 제를 올리는 법도를 후대까지 남길 수 없다고 반대하여 결국 <궁경적전기>만 편찬되었다.] 한편 명도 원년(1032) 2월에 인종의 생모 이씨가 세상을 떠났다. 유아는 인종의 출생 비밀이 새어나갈까 두려워 이씨를 서둘러 매장하려고 했지만 재상 여이간이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러야 한다는 주장했다. 결국 유아는 이씨의 시신에 황후의 옷을 입히고 수은으로 봉해 주었다.[* 후일 세손 시절 조선 정조와 [[홍대용]]이 이를 논하면서 여이간은 주자에게 죄를 받을 만했지만, 지모는 탁월하기 [[왕안석]]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했다.] 시신을 궁 밖으로 내갈 때에도 여이간이 서화문으로 나가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유아는 황태후의 장례와 동격이니 안 된다고 거절하였지만 환관 나숭훈의 설득으로 결국 이씨의 장례를 성대히 치러 주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