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환 (문단 편집) === 강족, 흉노 토벌 === 젊은 시절에 삼보[* 경조윤, 우부풍, 좌빙익 등 후한의 수도권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지역에서 지내면서 태위 [[주총(후한)|주총]]에게 사사해 구양상서를 배웠으며, 장환은 서경상서에서 잡다한 말이 많아 45만여 언이나 되는 것을 9만 언으로 고쳤다. 대장군 양기가 초청했지만 병을 핑계로 거절했으며, 장환이 현량에 추천되면서 조정의 부름을 받고 의랑이 되었다. 155년에 안정속국의 도위가 되어 남흉노의 좌욱건, 대기, 저거, 백덕 등 7천여 명이 미직을 침범하고 동강의 종족들이 대거 이에 호응하자 이 때 장환은 군영에 있던 2백여 명의 군사만 이끌고 출병했으며, 군리들이 대적할 수 없다고 말렸지만 이를 듣지 않고 진격해 장성에 주둔하면서 병사들을 모았다. 장수 왕위를 보내 동강을 타이르면서 구자를 점거하고 남흉노가 동강과 교통하지 못하게 했다. 여러 호들이 서로 잇따라 장환과 화친해 좌욱건 등을 공격해 연달아 싸워서 이를 격파했으며, 이를 두려워 한 백덕이 무리를 이끌고 항복해 군의 경계가 평안해졌다. 동강의 수령은 장환의 은덕에 감동해 말 20마리, 선령의 추장은 금수레 8개를 보냈지만 이를 받아놨다가 여러 수령들 앞에 주부를 불러놓고 술로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냈다가 그들에게서 받은 물품을 모두 되돌려줬으며, 장환이 정직하고 청렴해 그들이 마음 속으로 탄복했다고 한다. 장환은 사흉노중랑장에 임명되고 158년에 흉노의 휴도각과 북쪽의 오환 등이 공격해 오원군에서 도료장군의 군문을 불태우고 적강에 진을 쳐서 연기와 불이 보였는데, 군사들이 달아나고자 했지만 장환이 군막 안에 앉아서 제자들과 태연자약하게 강송하는 것을 보고 진정했다. 장환은 오환에게 귀중한 예물을 가지고 사자를 파견하면서 휴도각을 모살하기를 꾀해 그들과 연락했는데, 오환 사람들이 재물을 탐내 휴도각을 암살했고 흉노가 오환에 대해 아무런 경계심이 없는 기회를 타서 오환이 흉노 각 부락의 추장을 암살하면서 흉노가 붕괴되었다. 158년에 남흉노의 여러 부가 오환, 선비와 함께 연변의 아홉 군을 침범하자 장환은 북중랑장에 임명되어 이를 토벌해 남흉노의 여러 부를 항복시켰으며, 장환은 선우 거차아가 국사를 통치하지 못한다고 해 그를 구금했다가 좌록려왕을 선우로 세우도록 주청했지만 [[환제(후한)|환제]]가 거차아를 돌려보내도록 해서 정으로 돌려보냈다. 159년에 환제가 [[양기(후한)|양기]]를 주살하자 양기의 부하였다는 이유로 면직되었으며, 황보규가 장환을 위해 7번이나 이를 조정에 주청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163년에 장환은 무위태수가 되어 요역과 조세 등을 개혁하면서 병사들과 여러 민족이 공평하고 평균적인 대우를 받도록 보장했으며, 무위에 2월, 5월에 출생한 갓난아이 중에서 부모와 출생일이 같은 갓난아이를 모두 죽이는 풍속이 있었다. 사람을 파견해 도처에서 선전하면서 사람들에게 갓난아이를 죽이는 것은 요괴와 유사한 금기임을 알리면서 상벌 조문을 명확히 규정해 도처에 붙였는데, 갓난아이를 죽인 부모를 징벌하면서 갓난아이를 살린 부모에게 상을 내려 갓난아이를 죽이는 풍속을 금지하고 무위군의 주민들은 장환의 은혜에 사당을 세워 그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장환은 무위를 다스린 공적을 인정받아 황보규의 후임으로 도료장군에 임명되어 유주와 병주를 평정했으며, 166년 봄에 대사농이 되었다. 그 해 여름에 장환이 장군이 아닌 것을 알고 선비가 남흉노, 오환 등과 결탁해 3, 4천명 또는 5, 6천 명의 기병을 파견했으며, 유주, 병주, 양주의 9개 군을 침입해 대대적으로 약탈했다. 조정에서 장환을 사흉노중랑장으로 임명했으며, 9경의 신분으로 유주, 병주, 양주와 도료교위와 오환교위의 군사를 지휘하면서 감독하게 했다. 또한 자사 및 2천석 관원의 치적을 감찰한 권리를 부여받았으며, 흉노와 오환이 장환이 수비를 맡게 된 사실을 알고 20여 만명이 항복하고 선비는 요새 바깥으로 도망쳤다. 167년에 동강과 선령이 기병 5, 6천 명으로 관중을 공격해 여름에 대우와 운양을 함락하고 1000명을 살해했다가 여름에 강족이 삼보를 침범하자 사마 윤단과 [[동탁]]을 보내 격파[* 후한서 동탁전에서는 양주의 한양(천수)에서 격파했다고 나오며, 위서 동탁전에서는 병주에서 격파했다고 나온다.]해 죽은 자와 포로가 1만 명을 넘어 깨끗이 평정되었다. 전반적으로 장환의 양주 통치 및 진압 전략은 반군 진압도 진압이지만, 양주의 주민과 소수민족의 안무에 힘쓰고 지역을 안정시키는데 주력하는 온건책이었다. 그래서 강경책을 주장하는 단경과의 갈등이 심했고, 단경이 장환을 죽이려는 것을 사전에 알아챈 황보규가 급하게 두 사람의 갈등을 중재해서 양주 삼명이 상잔하는 일을 막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