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장훈복벽 (문단 편집) === 반복벽파의 역습 === ||[[파일:1917년자금성공격.jpg]]|| || 1917년 7월 12일 함락된 자금성 || 하지만 장쉰의 복벽은 머지 않아 난관이 부닥쳤다. 중국 어느 곳에도 장쉰의 복벽을 원하는 이는 없었던 것이다. 다만 레지널드 존스턴의 친구인 찰스 엘리엇 경은 즉각 베이징 시민들이 복벽을 환호하며 온 베이징 시내를 황룡기로 장식했다고 이에 '''불만스러워하며''' 서술했고, 실제로 베이징의 상점들에서 용기의 색인 황색이 동나거나 사람들이 다시 청조 시절의 복장을 하는 등 베이징 시민들은 복벽에 찬성하거나 최소한 침묵했고ㅡ [[멍언위안]]을 비롯하여 일부 군벌들도 복벽에 호응하긴 했다. 하지만 이건 예외일뿐, 10여종의 신문이 정간함으로 항의했다. 전국 각지의 신문들은 복벽을 반역으로 성토했고 광둥에서 호국 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쑨원]]은 7월 4일 [[탕사오이]] 등과 함께 토역 선언을 발표했다. 국민당이야 공화정을 위해 수십년을 투쟁한 세력이니 말할 것도 없었고 원래 복벽에 호의적이었던 [[돤치루이]]나 북양군도 [[리위안훙]]의 축출을 원했지 장쉰이 선통제를 등에 업고 국정을 농단하는 꼴을 봐줄 이유가 없었다.[* 반면, 장훈이 자기가 권력을 독점하려 하지 않고 돤차루이같은 다른 북양군 군벌들에게 권력을 분배했으면 최소한 이들의 지지는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라고 추측하는 사럼도 있다. ]량치차오를 비롯한 정객들도 입헌 군주정을 버리고 공화정을 지지하기로 한 터라서 캉유웨이 정도를 제외하곤 복벽을 비판했다. 반복벽파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1. 국체를 정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데 이미 정해진 후 다시 변경을 도모한다는 것은 국가에 해를 가져오는 것이다. 2. 민권이 날로 번창하여 다시는 한 집안이 위세를 갖고 만민을 길들일 수 없다.[* 돤치루이의 주장] 3. 민국의 관리가 공공연히 민국에 반기를 든 것은 역적이다. 4. 처음에 황제를 백성으로 만들고 각국의 승인을 받기 어려웠는데 이제 다시 백성을 황제로 바꾼다면 각국의 승인받기가 더 어렵다.[* 량치차오의 주장.] 5. 역사적으로 제제가 공화제로 바뀌면 치안을 얻을 수 있으나 공화정을 제정으로 바꾸면 치안을 지킬 수가 없다.[* 돤치루이의 주장.] 6. 공화 국가는 국가의 공유이나 군주 국가는 국가의 사유이다. 7. 만청이 중국을 혼란시킨 것이 9세의 원한이 되었다.|| 혁명당원들은 물론 펑궈장을 비롯한 다수 군벌들이 복벽 반대의 통전을 장쉰에게 보냄으로 여론은 완전히 기울어졌다. 리위안훙은 1등 공작 자리를 거절하는 한편 일본대사관으로 도피하여 7월 2일 톈진으로 밀사를 보내 돤치루이를 다시 국무총리로 임명하고 부총통 펑궈장에게 대총통 자리를 대행하도록 전보를 보냈다. 7월 3일 돤치루이는 톈진 마창에서 국무총리 임명을 수락하고 장쉰을 토벌할 것을 촉구하는 전보를 전국에 보내고 교통계 양사이 등의 재정 지원을 받았으며 량치차오 등의 문필 지지를 받았다. 이에 펑궈장이 대리총통 자리를 수락한다는 전보를 보내왔고 [[차오쿤]], [[펑위샹]] 등이 군대를 이끌고 돤치루이를 도와 베이징을 공격했다. [[탕지야오]]를 비롯한 서남군벌들도 장쉰 토벌을 통전해왔다. 7월 5일 돤치루이는 토역군(討逆軍)을 조직하여 사령관에 취임했고 [[니쓰충]]을 토역군남로총사령관에 임명했는데 토역군은 그 수가 5만 7천에 달했다. 같은날 돤치루이 소속의 복엽기가 자금성을 폭격하여 3발의 폭탄을 떨어뜨렸는데 이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공습이었다. 피해는 가마꾼 한명이 부상당한 것이 고작이었으나 청 황실과 변자군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변자군들은 앞을 다투어 탈영, 5천에 달했던 변자군은 삽시간에 1500으로 줄어버렸다. 캉유웨이도 사태가 불리해짐을 알고 미국 공사관으로 달아났다. 토역군은 10만으로 불었으나 장쉰의 1500 변자군은 계속 줄었다. 돤치루이는 투항을 요구했지만 장쉰은 거부하고 항전했다. 7월 12일 베이징은 [[우페이푸]]가 지휘하는 3사단의 공격에 병사들이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면서 서쪽이 뚫렸고 펑위샹의 16혼성 여단이 국회 의사당과 선무문을 점령했다. 장쉰의 최후의 병력은 장쉰의 관저에서 저항했으나 결국 끝없는 포격에 전의를 상실하고 패퇴했다. 장쉰은 휴전을 요청하다가 결국 네덜란드 공사관으로 달아났는데 장쉰의 주장에 따르면 그건 사실이 아니라 한다. 장쉰의 주장에 따르면 궁지에 몰렸을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 >복벽은 폐하께서 원해서 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군주에 대한 우리의 경외심에서 나온 것이다. 만약 이 위기의 순간에 내 자신의 안전을 찾아 도피해서 어린 황제를 위험에 빠뜨린다면, 나의 죄를 어떻게 씻을 수 있겠는가? 오늘 나에게 죽음 말고 다른 길은 없다. 예로부터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우리 가문의 전통이었다.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이제 내가 죽는다는 생각이나 처자식과 재산을 잃는 게 아니다. 나는 우리 군주께 해악을 끼쳤다는 사실 때문에 고통스럽다. 이 때문에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는 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장쉰은 마지막 순간까지 싸웠으나 장쉰의 아들의 주장에 따르면 네덜란드 공사가 차를 보내어 장쉰의 뜻과 어긋나게 그를 네덜란드 공사관으로 데려갔다 한다. 어쨌거나 복벽은 그렇게 끝났다. 이 난장판에서 죽은 자는 30명이 채 되지 않았다. 7월 14일 돤치루이가 베이징에 입성하여 내각을 조직함으로 장훈 복벽은 끝났다. 7월 15일 돤치루이는 [[펑더린]] 등 복벽에 옹호한 인물들에 대해 대대적인 체포령을 내렸으나 이들 다수에게 상징적인 처벌만을 내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