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훈복벽 (문단 편집) === 종사당의 복벽 운동 === 1913년 10월 10일, 대총통에 취임한 [[위안스카이]]는 독재 권력을 강화하며 황제 즉위를 꿈꾸었고 1915년 12월 12일 추대의 형식으로 [[홍헌제제]]를 단행하여 1916년을 홍헌원년으로 선포했지만 [[차이어]], [[량치차오]], [[탕지야오]] 등이 주도한 [[호국전쟁]]으로 궁지에 몰려 1916년 3월 23일 제제를 취소했고 얼마 후인 6월 6일 사망했다. 위안스카이가 나라를 들쑤셔 놓은 상태에서 이를 수습하기도 전에 사망하자 [[중화민국]]은 [[군웅할거]]의 [[난세]]로 돌입했다. 각 지방마다 [[군벌/중화민국|군벌]]들이 득세하여 자신들의 독립 왕국을 꾸려나가는 동안 멸망한 청나라의 옛 황족들은 제국을 복고하기 위한 일련의 움직임을 꾀하고 있었다. 선통제가 퇴위하기 직전인 1912년 1월 12일 청황실 왕공과 친귀들이 모여 종사당을 조직하고 황위의 유지를 목적으로 활동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군주제 유지를 주장하는 조직을 만들어 공화정을 반대하는 움직임을 벌였으나 선통제는 그 해 2월 12일에 퇴위하였다. 하지만 300년 가까이 유지되고 있던 청나라 황실을 따르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았고 숙친왕 선기[* [[카와시마 요시코]]의 아버지.] 등은 [[다롄]]에서 일본과 결탁하여 [[만몽 독립운동]]을 통해 그곳에서만이라도 군주제를 유지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베이징]], [[다롄]], [[칭다오시|칭다오]], [[상하이]] 등지에서 복벽당이 준동하여 직예성(현재의 [[허베이성]]), [[산둥성]], [[후베이성]]과 [[만주]]에서의 왕정복고 움직임을 꾀했다. 이들 복벽당은 초기엔 위안스카이를 설득하여 그의 손으로 황실을 복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전 황제의 스승을 비롯한 복벽당 인사들은 [[1914년]] 8월 31일에 [[쉬스창]]에게 복벽을 청했고 황실 복벽론자들을 규합해 언론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자신이 황제가 되기 위하여 복벽주의자들을 처벌하고 11월 23일 복벽주의의 주장을 금지하였다. 이 때문에 복벽주의는 잠시 수그러들었으나 위안스카이가 황제병에 걸려 칭제를 하려 하자 다시 힘을 얻기 시작했다. 1915년 12월 12일 위안스카이는 [[홍헌제제]]를 선포했다가 12월 25일 [[호국전쟁]]에 직면했고 몇 달 만에 전국각지에서 호응하는 독립선포가 이어졌다. 위안스카이가 궁지에 몰린 상황을 틈타 쉬스창, 장쉰 등은 선통제의 복벽을 시도하였다. 청 황실을 복벽하여 제국을 연 다음에 위안스카이가 총리가 되면 현재 사방에서 압박해오는 민당의 무리가 조용해질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계산이었다. 하지만 청나라 황실은 이들과 동조했다가 만일 실패하면 민국에서 청나라 황실에 약속한 특권[* [[자금성]]과 예산 지원 등.]이 취소될까 봐 두려워하여 그들의 움직임에 동참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