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훈복벽 (문단 편집) === 정사복벽의 시작 === ||[[파일:정사복벽.jpg]]|| || 옥좌에 다시 앉은 [[선통제]] || 1917년 6월 30일 새벽 4시 장쉰은 육군총장 [[왕스전]], 보군통령 강조종, 경찰총감, 12사단장 진광원, 13사단장 등을 거느리고 자금성으로 가서 선통제를 알현한 다음에 어전회의를 열어 선통제의 복위와 왕정복고를 결의했다. 그리고 왕스전, 양정분, 강조종을 총통부에 파견하여 정치를 반환한다는 문서에 도장을 찍도록 요구하였지만 리위안훙은 거절했다. 장쉰은 북경성문을 열어 변자군을 입성시키는 한편 전보국을 폐쇄하여 베이징과 타 지역의 연락을 끊었다. [[7월 1일]], 장쉰은 청나라 대신의 복장을 하고 캉유웨이, 왕스전 등 유신 수십 명을 거느리고 고개를 조아리며 22성 군민의 대표 자격으로 선통제에 정권 회수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20년 이래 학자들은 유럽화에 빠져 있었고 간민들은 반란을 일으켜 양자가 서로 어울러져 마침내 [[신해혁명|신해의 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공화제가 실시된 후 위 아래가 무리를 지어 뇌물로 서로 싸우면서 각각 사사로이 집단을 만들고 탐오하며 흉폭하여져 도덕은 문란하여 졌습니다. 신 등은 눈을 뜨고 시세를 탄식하며 하늘의 화를 통절하게 느끼면서 밖으로 각국이 방관하고 있는 사실을 살피고 안으로 백성과 나라의 진실한 사정을 살펴 공화정체가 우리 백성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신 등은 반복하여 비밀리 상의하여 공동으로 맹서하여 22개 성의 군민 진의를 대표하여 우리 황상께서 정권을 회수하기를 삼가 청합니다.|| 이에 선통제는 장쉰이 준비해 둔 유지를 발표함으로 7월 1일에 조정에 나가 정사를 보며 대권을 회수하겠다고 하였다. 캉유웨이가 복위 조서를 낭독했는데 내용이 다음과 같았다. ||국체를 공화라 부르고 있으니 총통은 반드시 선거에 의하여 뽑는데, 권세가 있으니 사람들은 요행심에 차 있다. 그리고 선거기간은 겨우 5년밖에 되지 않으니 5년에 총통을 한 번 선거하게 되면 큰 난리가 되고 1년 혹은 수 개월 만에 총리를 바꿔야 되니 작은 난리가 된다. 선거가 지나면 난리도 곧 지난다. 앞서 조정이 정치를 잘못하게 되면 별도로 임시정부를 설치하여 본래 공화정을 시행하여 본 다음에 난리가 없어지고 백성을 평안하게 하여야 족한 것이다. 이제 공화제를 이미 6년이나 실시하였지만 변란이 끊이지 않아 마침내 정권을 회수하여 처음의 뜻과 상부하도록 한다.|| 조서 낭독 후 캉유웨이는 만세삼창을 외쳤다. 이 복벽 주접 원고는 애초에 캉유웨이가 기초한 것이 많았는데 이는 캉유웨이가 선통제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일본의 입헌군주제를 모범으로 삼은 헌정의 이상을 실시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