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저우언라이 (문단 편집) === 긍정적 평가 === > 저우언라이만큼 청렴하고 욕심 없는 정치인은 보지 못했다. 자식도 없다고 한다. 이런 사람이 또 있다면 UN은 언제든지 조기를 게양하겠다. >---- > 前 UN 사무총장 [[쿠르트 발트하임]], 주은래가 죽은 뒤 UN이 조기를 게양한 이유에 대한 변 >마오는 어떤 모임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저우는 서서히 하나가 되어갔다. 마오의 열정은 반대파를 압도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저우의 지성은 그들을 설득하거나 이용하려 했다. 마오가 냉소적인 사람이었다면, 저우는 냉철한 인물이었다. 마오는 스스로를 철학자라고 생각했고, 저우는 행정가나 협상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마오는 역사를 가속화하기를 열망했지만, 저우는 그것의 흐름을 이용하는 것에 만족했다. >---- >[[헨리 키신저]], ''헨리 키신저의 중국 이야기'' [[https://books.google.co.kr/books?id=4pFfYliTIMkC&q=suffused&redir_esc=y#v=snippet&q=suffused&f=false|#]] 현대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음에도 흔히들 "저우 총리"라 부르고 [[시진핑]]조차도 저우언라이에 대한 칭송을 규제하지 않을 정도. 성격도 원만하고 관계를 조정하는 데 뛰어나서 동료들이 저지른 실책들을 훈훈하게 마무리하는 미담들이 많이 들려온다. [[대약진운동|막장]] [[문화대혁명|사건]]들이 많이 벌어진 격동의 6,70년대 중국 현대사의 중심에 권력을 쥐고 이를 막지 못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마오쩌둥에 붙어 일신의 안녕이나 꾀하며 이미지 관리에 집착한 위선자라는 평도 있다. 허나 적군이던 [[장제스]]의 여자 문제를 훈훈하게 마무리해주고, [[문화대혁명]] 시기에 전 왕조의 유산이자 소중한 문화유산인 [[자금성]], [[포탈라궁]] 등을 [[http://v12.battlepage.com/??=Board.Etc.View&no=89407|지켜내는 등, 양면적인 평가가 공존하는 인물이다.]] 그의 청렴성에 관한 일화가 하나 있는데, 저우언라이가 총리로 재임하던 당시 [[파키스탄]]의 관료였던 사람이 증언에 따르면 [[파키스탄]] 탁구 국가대표팀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국빈 대접 차원에서 저우언라이가 자신의 집에서 그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저우언라이가 무언가 걱정하는 듯 보이자 [[파키스탄]] 국가대표팀 선수가 저우언라이에게 "뭔가 문제라도 있으시냐"고 물었는데 저우언라이가 대답하길, "우리 집에 식기가 부족해서 말입니다. 이웃들에게 좀 빌려달라고 얘기해 뒀었는데, 늦어져서 걱정입니다." 즉 일국의 총리 사저에 기껏해야 수십 명 정도를 대접하는 데 필요한 식기조차 없었던 것. 정치가로서는 평생 [[마오쩌둥]]과 함께 한 일생일대의 동지였다. 위에도 나왔지만 저우언라이는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을 초기에는 적극 찬성했으나 후에 돌아섰고, 이후에도 계속 이런 정책적 과오들을 자신의 권한 내에서 또는 [[마오쩌둥]]이 노여워 하지 않는 안에서 최대한 완화시키려고 했다. [[마오쩌둥]]의 카리스마가 화려한 언변과 날카로운 필력에 원천을 둔 것이었다면, 저우언라이는 조용하면서도 유연하고 포용력 있는 성품으로 '''좀처럼 적을 만들지 않는''' 카리스마를 가졌다. 내전 당시에도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 양 쪽으로부터 폭넓은 존경을 받았으며, 아직까지도 [[중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현대 중국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다. 심지어는 명재상의 대명사인 [[소하]]나 [[제갈량]]과 비교되기도 한다. 과연 저우는 [[제갈량]]의 후[[출사표]]에 나온 '국궁진췌 사이후이'를 좌우명으로 삼았다. 최근에는 중국에서도 이런저런 잘못들을 갖고 [[마오쩌둥]]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많지만, '''저우언라이를 비판하는 사람은 정말 잘 없다.''' 일각에서는 [[신격화|사당에 신의 한 명으로 모실]] 정도라고 하니 그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마오쩌둥]]의 급진적인 잘못을 노여움을 사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권한으로 최대한 완화시키려고 노력했다. 다만 그 당시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피해가 너무 크다 보니 생사를 함께한 혁명 동지들이 별의별 이유로 숙청당하는데도 총리로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하고 지켜만 보거나, 일이 망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마오의 일에 적극 동참하던 그를 일부에선 '''고의적 방관자'''였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것이 저우언라이의 몇 안되는 비판점이다. [[대약진운동]] 문서에도 다뤄지듯이, 저우언라이의 바짝 엎드리는 비굴한 행태, 경제가 망해가고 있는 걸 알면서도 무리한 계획을 열심히 독려하는 모습을 보면 아무리 숙청이 두렵다지만 이렇게까지 일조해야 했나 싶을 정도다. 물론 저우언라이라고 해서 이런 점을 후회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2007년에 저우언라이의 부인 덩잉차오가 보관하던 저우언라이 개인의 일기가 공개되었었는데 거기에는 저우 본인이 사망 직전 [[마오쩌둥]]을 국가 주석으로 세운것을 후회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사실 따지고보면 마오쩌둥이 급진적인 경제정책에 집착하지 않고 차근차근 경제성장이 진행되었으면 훨씬 이전에 세계 수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어, 국제적인 입지도 단단해졌을터였다. 또한 저우언라이 자신도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을 완화시킬려고 고생을 사서 했고, 거기에다가 문화대혁명 직후로 동료들이 숙청되는 건 물론 본인도 죽는 그 순간까지도 [[4인방]]과 [[홍위병]]들의 공격을 받아야했다. 자신의 수양딸인 쑨유스도 장칭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며 사위도 정신적인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으니 당연히 마오쩌둥에 대해서 좋은 감정이 들 수만은 없기는 했다. 게다가 마오쩌둥은 꼭 동지를 출당하거나 혹은 벌을 내릴 때 저우언라이를 통해 발표하도록 하여 책임을 떠밀었고, 저우언라이는 본의 아니게 이런 숙청 명령서에 가장 많이 사인을 하게 되었다. [[류사오치]]의 경우도 출당 발표를 저우언라이가 했을 정도. 허나 역설적이게도 그가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면 그 역시 숙청의 굴레에서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며, 그가 없었으면 홍위병은 [[중국]]의 모든 문화재를 박살내고 [[자금성]]은 잿더미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루는 [[황하]]가 범람해 현장에 긴급방문했는데 일하던 인부들이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가 지시를 어떻게 내릴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이때 저우언라이가 한 말은 "여러분, 아무쪼록 의견을 내주세요." 인부들이 깜짝 놀라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 "우리들은 주 총리를 진심으로 환영합니다."라고 판에 박힌 인사를 하자 총리는 "우리는 모두 일가친척입니다. 환영할 필요는 없습니다.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문제는 '다리를 어떻게 하는가'입니다. 모두 다리를 위해 노력한 사람이므로 경험도 풍부합니다. 나는 모두의 의견에 따라하고 싶은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저우언라이의 평상시 인품이 어떠한지 보여주는 대목. 실제로 이런 점은 [[덩샤오핑]]이 상당 부분 본받기도 했다. 대외적으로도 대인의 면모를 많이 보였다. [[중국공산당]]이 보통 구 [[청나라]] 황족들에게 매우 비판적이고 적대적이었던 데 반해 저우언라이는 그들에게 호의적까지는 아니더라도 매우 동정적이었다. 특히 청 황조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의 남동생인 애신각라 부걸과 그의 [[일본인]] 아내 [[사가 히로]]가 같이 중국에서 머무는 것을 허락하였고, 그들의 장녀 혜생의 편지를 받고 사가 히로를 초청한 사람 또한 저우언라이 총리였다. 그러나 편지를 보낸 혜생은 어머니가 일본인과의 결혼을 반대하자 연인과 자살했고, 사가 히로는 차녀 호세이(호생)의 결혼은 막지 않았다. 중국과 [[일본]]은 적대국이었기 때문에 편지를 읽고도 그냥 무시하는 것이 오히려 상식적인 일이었지만, 그는 관대하게도 한 소녀의 편지를 읽고 청을 들어준 것이다. 옛 순친왕부에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고 최고의 대우를 해준 것도, [[문화대혁명]] 때 부걸의 집이 홍위병들에게 습격당해 고초를 겪자 경비병을 파견하여 그들을 지켜준 것도 모두 저우언라이 총리였다. 뿐만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아버지였던 [[천두슈]]는 1930년대 공산당을 탈당했고, 당시 대세였던 [[스탈린주의]]자들에게는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트로츠키주의]]로 전향했다가, 나중엔 아예 공산주의를 버렸다. 하지만 저우언라이는 [[국공합작]] 때 국민정부가 옮겨온 [[충칭]]에 머물 당시, 당시 중국 국민 감방에서 출소했던 천두슈가 병석에 눕자 병문안을 왔고, 거금을 치료비로 건내기도 했다(그러나 천두슈는 거절했다.). 당시에도 천두슈가 옌안에 있던 마오쩌둥에게 "트로츠키파 배신자이자 잘못된 지도로 당을 구렁텅이로 이끈 무능력자"로 취급을 받았던 것을 감안하면 저우언라이의 천두슈에 대한 대접은 상당히 대인의 그것이었다. 1957년 전국인민대표회의 민족위원회가 주최한 민족공작좌담회에선 "우리는 대민족주의, 특히 [[대한족주의]]와 [[지방민족주의]]에 모두 반대한다. 반드시 민족 구역의 자치를 실현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중국 민족의 역사발전과 경제발전, 혁명발전에 가장 부합하는 정책이다. '''각 민족들은 완벽한 평등을 누리고 그 어떤 차별을 받아서도 안 된다.'''"라고 말하며 배타적 [[민족주의]]와 편협한 대국 [[쇼비니즘]]을 질타하기도 했다. 지금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을 본다면 저우언라이가 저승에서 땅을 칠 것이다. [[내몽골 인민혁명당 숙청 사건]] 때는 내몽골 자치구 정부주석을 맡고 있던 우란후를 지켜주기도 하였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방중을 성사시킨 [[헨리 키신저]]는 2012년 출간된 책에서 "나 자신이 살아오며 저우언라이만큼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인물은 없었다"고 그를 극찬했다. 닉슨 역시 자신이 방중했을 때 저우가 "내가 [[암]]에 걸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으니, 내가 살아있을 때 빨리 미중 수교를 성사했으면 한다"는 말을 건네는 걸 보며 감동받았다고 한다. [[북한]]에서도 인기가 많다. [[황장엽]]의 회상에 따르면 정작 원조의 양은 [[소련]]이 중공을 앞섰지만,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이만큼 도움을 많이 해줬지 않느냐"라며 생색내고 툴툴거렸던 반면 저우언라이는 겸손하게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라"라고 했다고 한다. 실제로 [[조중변계조약]] 때 북한에 양보를 해주기도 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