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저우언라이/생애 (문단 편집) === [[중화소비에트공화국]](1931~1934) === 한편 마오쩌둥과 주더는 장시성 서남부의 광대한 지역을 장악하여 가장 큰 소비에트 중 하나를 이끌고 있었다. 1931년 9월, [[제3차 초공작전]]까지 격퇴한 중국 공산당은 1931년 11월, 루이진에서 의기양양하게 마오쩌둥을 주석으로 추대하여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주더가 이끄는 홍1방면군의 숫자는 8만에 달했고 홍군은 계속 증강되어 1933년에는 30만에 달했다. 저우언라이는 상하이에서 영국 증기선을 타고 [[홍콩]]에 도착, 홍콩에서 산터우로, 산터우에서 광둥, 푸젠, 장시를 거쳐 국민당의 감시를 피해 12월 말 수주일의 여행 끝에 루이진에 도착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오쩌둥을 만나게 되었다. 둘은 1927년에 잠시 마주친 적이 있었으나 그외엔 접점이 없었다. 마오쩌둥은 일찍이 농촌을 근거지로 하는 비정통 이론을 고수하였으며 모스크바로의 초청도 거부하고 스탈린의 강의보단 현장에 있는 것을 중시했다. 그리고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것이면 코민테른의 당중앙의 지시도 씹는 반골형의 인물이었다. 저우언라이는 몇가지 이유 때문에 마오쩌둥의 입장을 조금씩 지지하기 시작했는데, 1930년 2월 저우언라이가 내렸던 간저우 공격에 대해서 마오쩌둥은 실패를 예상했고 이는 사실로 드러났다. 그리고 저우언라이가 회의적으로 보았던 마오쩌둥의 장시성 동북부 지역의 기지 확보는 초공작전에서 국민당 공격에 대한 효과적인 섬멸로 돌아왔다. 이 때문에 저우언라이는 차차 마오쩌둥의 군사이론을 지지하게 되었다. 당시 상하이 임시중앙을 비롯한 다수파는 국민정부의 [[제4차 초공작전]]에 대응하기 위해 병력을 이끌고 푸저우, 난창과 같은 강력한 국민당 도시들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고 마오쩌둥, 주더, 왕자샹 등의 소수파는 [[마오쩌둥#s-6.4|적이 약한 곳에서 적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2년 8월 난창 공격에서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주장을 지지했다가 준비만을 강조하는 소극적인 행태를 보인다고 비난을 받았고 마오쩌둥을 옹호한 것에 대해서는 [[리리싼]]도 그런 식으로 옹호하지 않았냐고 비난 받았다. 베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신중성을 인정하면서도 공산당이 국민당을 과소평가하고 있으며 마오쩌둥을 과하게 공격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마오쩌둥을 군사분야의 전문가로 일선에 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회의 끝에 실각하여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명목상 지도자로 물러나게 되었고 저우언라이가 제1야전군 총정치위원에 임명되었다. 1933년 1월 상하이의 임시당중앙도 장시성으로 이동했으며 1933년 10월 코민테른 대표 [[오토 브라운]](이덕)도 장시성으로 옮겨왔다. 보구는 오토 브라운을 군사고문 책임자로 임명했다. 5월의 지휘계통 개편으로 군사위원회는 루이진으로 이전했으며 저우언라이는 총정치위원직을 유지했으며 주더가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로 인하여 당중앙이 최전선을 통제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