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저우언라이/생애 (문단 편집) === 사망(1976) === 하지만 도와주는 이도 별로 없이 문혁의 혼란을 수습하려다 보니 건강도 점점 악화되기 시작했고, 방광암 선고를 받은 뒤에는 [[덩샤오핑]]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업무 인계에 들어갔다. 문화대혁명이 마지막 기승을 부리던 1975년 2월, [[4인방]]은 마지막 승부수로 저우언라이 공격에 나섰다. 물론 실제 표적은 저우언라이 대신 사실상의 실세였던 [[덩샤오핑]]이었다. 원래 상당히 경과한 후에야 증세가 나타나는 다른 암과는 달리, [[방광암]]은 혈뇨라는 증상이 조기에 나타나기 때문에 치료가 쉬운 암에 속하고, 빨리 치료했다면 아마도 나을 수 있었겠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치료가 늦어졌다. 문제는 여기서 마오가 자신보다 저우언라이가 장수할 것을 우려해 병치료를 방해했다는 설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이라면 이거야말로 [[토사구팽]]의 극치. 마오의 주치의가 쓴 '모택동의 사생활'이란 책이 있는데 문제점이 여럿 제기되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마오쩌둥과 그 당시의 중국에 대한 A급 원사료다. 이 책에는 마오가 저우의 방광암 치료를 허락해주지 않아 오랜 기간 저우언라이가 고생했고, 아내인 덩잉차오가 사정사정해 겨우 허락을 얻어냈다는 내용이 나온다. 다만 '모택동의 사생활'은 마오가 저우의 장수를 우려해서 암치료를 방해했다기보단 마오 본인이 암을 전문의사들이 치료한다는 행위 자체를 불신했기 때문에 막은 것으로 기록한다. 마오는 암을 일종의 불치병으로 여겼기때문에 치료가 오히려 환자의 수명을 앞당긴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토사구팽 차원에서의 병 치료 방해는 장융의 주장에 더 부합하다. 아무튼 마오가 저우언라이의 건강에 도움이 안 되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여담으로 저우가 마오에게 침상보고를 할 때 무릎을 꿇고 보고를 한 점 등 좋게 보면 충성심이 높은거요, 나쁘게 보면 굴욕적인 얘기도 나온다. 하긴 그 정도 처신했으니 마오의 숙청을 피해 장수했던 걸지도... 사실 보통 장수하는 2인자들은 이러한 성향을 가진 자들이 많다. [[김영남]]과 비슷한 부류라고 볼 수 있을 듯. 다르게 보면 그 정도 굴욕도 감내하면서 마오의 재앙적 실책들을 수습한 걸지도 모른다. 결국 [[문화대혁명]]의 피해가 컸기 때문에 그것을 수습하러 격무를 하느라고 몸이 악화되었다고 한다. 저우언라이는 혈뇨가 나올 때까지 정상업무를 수행했는데, 수 차례 수술을 받았음에도 병실에서 계속 집무를 수행할 정도였다. 당연히 건강이 점점 나빠질 수밖에... 1976년 1월에 죽은 뒤에는[* 정확히 8개월 뒤 [[마오쩌둥]]도 같은해에 죽는다.] 집권층으로부터 생전보다 더 격렬한 비판을 받았지만, 오히려 일반 대중들은 자발적으로 천안문 광장에 모여서 몇 개월 동안이나 계속 추모 집회를 개최했다. 이 때 등장한 구호 중 하나가 '''"저우 총리를 반대하는 자는 누구든지 타도하라!"''' 또 이때 대놓고 등장한 다른 구호가 '''"마오는 물러가시오!"'''였다. 당시 중국 민중들이 [[문화대혁명]]을 얼마나 싫어했는지 알 수 있다. 이 후폭풍은 [[덩샤오핑]]이 집권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그가 죽었을 당시 그의 시신 앞에서 [[장칭]]이 오만방자하게 굴자 [[주더]]는 "당신은 인간도 아니오!"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4인방과 그 추종자들은 이러한 저우언라이 추모 열기를 물론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집회에서도 집권층에 대한 불만이 공개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하며 점차 반정부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정부는 4월 5일에 군대를 동원해 집회를 무력으로 진압해 버렸고, 동시에 그 책임을 덩샤오핑에게 떠넘겨 실각시켜 버렸다.([[천안문 사태#s-2|4.5 운동(1차 천안문 사태)]] 참조.) 장례식에서 추도사는 [[덩샤오핑]]이 읽었으며, 그의 유해는 [[화장(장례)|화장]]되어 덩샤오핑이 비행기를 타고 유언대로 중국 각지에 뿌렸다. 이때 장례식에서 4인방 중 한 명인 [[장칭]]이 장례식에서 뻣뻣한 태도를 보이자 사람들이 분노해서 "저 여자를 두들겨 패라!!"라고 말하는 사건도 있었는데, 장칭이 문화대혁명의 주 실행 담당 중 한 명으로 인민들의 증오를 산 자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그의 아내 덩잉차오도 죽은 후 시신을 [[카데바]]로 기증하고 용도가 다 되면 [[화장(장례)|화장]]하라고 했는데, 이 유언이 생전에 남편과 함께한 약속이라고 누차 측근에게 상기시켰으나, 결국 그녀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고 그녀의 유골은 [[팔보산 혁명공묘|팔보산 혁명묘지]]에 봉안되어 있다. 저우언라이가 사망하자 UN은 이례적으로 조기를 내걸었는데, 당시 [[냉전]]의 험악한 분위기를 고려할 때 이는 파격적인 조치였다. || [[파일:attachment/저우언라이/6457e1.jpg|width=100%]] || || 최후의 모습 || 저우언라이의 사망으로 중국 전체가 패닉에 가까운 슬픔에 빠져들었다. 당시 중국에 있던 영국 외교관 로저 가사이드를 비롯한 외국인들의 기록에서조차 당시 기록을 생생히 전하고 있는데, 몇달 후 마오쩌둥의 죽음조차도 저우언라이의 죽음 당시의 추모 분위기에 비하면 냉랭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3월 19일, 베이징 우가소학 학생들의 추모 화환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인민들이 상경하여 추모 화환을 바쳤으며, 군대까지 합류했다. 4월 4일 청명절 추모인파는 무려 200만을 헤아렸다. >그는 재산도 남기지 않았고, 아이도 없었으며, 무덤도 없었고, 유해도 남기지 않았다. 그의 유골은 조국 강산에 뿌려졌다. 그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지만,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나라 전체가 그의 것이고, 수억의 자손이 있으며, 중국의 모든 땅이 그의 무덤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남겼다. 그는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살아있을 것이다. 그는 누구인가? 그는 누구인가? 그는 우리의 총리이다! >---- >저우언라이를 추모하는 익명의 화환 >[[장칭|당신]]의 날은 얼마 남지 않았다. 감히 우리의 총리를 반대하는 자는 누구든지 태양을 향해 짖는 미친 개와 같다. 현실을 각성하라! >---- >저우언라이를 추모하는 익명의 화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