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저우언라이/생애 (문단 편집) === 유년기(1898~1912) === 1898년 3월 5일 [[청나라]] [[장쑤성]] 화이안의 가난한 하급 관료 출신 집안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의 할아버지 저우판룽(주반용)은 지방 관리 출신으로, 1870년대에 장쑤성에 정착했다. 정작 저우언라이는 할아버지의 고향 [[저장성]] [[사오싱시]]를 자신의 고향으로 여겨 태어난 곳인 장쑤성보다 저장성에 더 애착을 가졌다. 할아버지 저우판룽의 대에는 집안이 윤택하였으나 저우판룽의 네 아들들 중 둘째인 저우언라이의 아버지인 저우이넝(주이능)은 과거에 낙방하였고, 인자하지만 약하고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았다. 저우이넝은 과거에 낙방했을 뿐만 아니라 가산을 모으는 데도 능하지 못하여 한에비징, [[산둥]], [[안후이]], [[선양시|선양]], [[몽골]], [[쓰촨]] 등을 떠돌며 가족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그의 어머니 완둥얼은 현 지사의 딸로 태어나 전통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저우언라이는 자신의 외조모는 단순한 농부 집안인 것을 강조하여 자신이 무산 계급 출신이라고 강변하였다. 저우언라이가 태어날 무렵에 저우언라이의 작은 삼촌인 저우이간(주이감)이 [[결핵]]에 걸려 앓고 있었는데 저우이넝은 저우언라이가 태어난 지 4개월 후에 병환으로 아들을 낳을 가능성이 없는 동생에게 저우언라이를 양자로 내주었다. 저우이간은 1899년 사망했고 저우이간의 아내 천 씨[* 1878년생으로 학자이자 의사인 천웬의 딸이었는데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는 저우언라이를 매우 정성스레 키웠다. 천씨는 문학에 능통해서 저우언라이에게 시, 서예, 회화 등을 교육하여 저우언라이는 이미 4세에 당시와 송사를 암송할 수 있었다. 자신을 잘 키워준 숙모에 대해 저우언라이는 1936년 "숙모야말로 나의 진정한 어머니였다"고 [[에드거 스노우]]에게 말했다. 이후 저우언라이의 친동생인 저우언보와 저우언서우가 태어났고 1904년 저우언라이 가족은 화이인현 칭장푸로 이사했다. 이때부터 저우언라이는 외가집에서 자라게 되었다. 이미 문학에 능통했던 저우언라이는 외조부가 소장한 [[서유기]], [[삼국지연의]], 설악전전, [[홍루몽]] 등의 고전을 읽으며 지냈다. 이때 유교 경전 등을 공부했는데 "저우언라이 평전"을 쓴 바르바라 바르누앙은 훗날 마오쩌둥에게 충성했던 저우언라이의 모습이 여기서 기인한 것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1907년 저우언라이의 생모가 사망했고 1908년 숙모 천 씨도 [[결핵]]으로 죽었다. 저우이넝은 아들들을 버리고 후베이로 떠나버렸고 저우언라이는 동생들을 데리고 화이안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숙부들이 보내주는 부정기적인 송금에 의지해서 살아야 했다. 저우언라이는 매우 어렵게 살았고 실질적인 가장이 되어야 했다. 결국 저우언라이는 1910년 만주의 선양에서 거주하던 큰아버지 저우이겅(주이갱)의 집으로 떠나 그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저우이겅 역시 자식이 없었기에 그는 조카를 잘 돌봐주었다. 이때 저우언라이는 [[공립학교]]를 다니며 현대 교육의 영향을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