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격전 (문단 편집) == 재평가 ==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에서 설명된 소위 전격전이라 불리는 교리는 '''실존한 적이 없으며''', 그 세부 사항은 실제 독일군의 전투 수행 방식에 대해 서방의 마비전과 [[기동전]], 그리고 [[소련군]]의 [[소련군의 종심돌파이론|전술적, 작전술적 개념]]들을 이것저것 뒤섞어 투영하여 만들어진 잡탕의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현재의 중론이다. 1940년 [[프랑스 침공]]에서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하인츠 구데리안]]의 도움을 받아 만든 작전을 [[프란츠 할더]] 장군이 꽤나 도용해서 현실에 옮겼더니 나온 결과가 놀라워서 "마치 번개 같군! 이 작전을 전격전이라고 부릅시다!" 라는 경위로 전격전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사실 전격전이라는 용어는 주로 서부전역에서 독일군이 보여준 포위중심기동전을 뜻하는데, 서부전역을 일컫는 다른 말인 지헬슈니트(낫질)도 [[윈스턴 처칠|처칠]]이 서부전역의 결과를 보고 '흠 낫질한 것 같은 작전이다'라고 한 말에서 생겨난 것이다. 즉 처음부터 딱히 명확한 개념이었던 적이 없었다. 전격전이란 단어가 최초로 공식적으로 쓰인 것도 영국의 일간지에서였으며, 당시 독일에는 이를 지칭하는 단어조차 없었다. 무엇보다 '''독일군은 결코 적 주력과의 교전을 회피하지 않았다'''. 독일군의 목표는 언제나 적 주력의 물리적 섬멸(annihilation)이었으며, 이는 19세기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졌을 만큼 그 유래가 깊다. 2차 대전기 독일국방군의 기본 교범이었던 1933년판 부대지휘론(Truppenführung)에서도 적 전력의 끊임없는 섬멸을 강조했다. 이를 보면 대부분의 경우 독일군은 적을 심리적으로 마비시키기 보다는 물리적으로 섬멸하는 것을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 적의 마비는 오히려 소련군 교리에서 중시되던 내용이다. [[투하체프스키]]가 고안한 '종심작전이론'에선 적군의 전열 한가운데에 돌격하여 쐐기처럼 돌파구를 연 이후에 교전을 회피하고 후방 사령부, 통신선로, 보급기지 등 종심표적으로 고속기동해서 타격하여 마비를 안겨주는 일명 '''충격군'''이 설정되어 있다. 충격군은 2차대전말 소련군 기갑부대 편제에 등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기동전]], [[제파식 전술]], [[작전기동군]] 문서 참조.] 일례로 1933년판 부대지휘론에서는 기갑부대의 주요 과업으로 "전선이 [[참호전]]등의 진지전으로 고착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적의 포병과 예비대를 섬멸하는 것" 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기갑부대는 적과의 교전을 회피한다'는 개념과는 다르다. 실제로 독일군이 수행한 수많은 포위섬멸전에서 기계화부대는 돌파-돌진 이후 대규모 희생이 따라오는 전투를 마다하지 않고 섬멸에 직접 참여했다. 만약 프랑스가 드골의 생각처럼 [[기동방어]]나 [[종심방어]] + 공세적 방어를 취했다면 독일군의 전격전이라 불리는 기동전은 실패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애석하게도 프랑스는 마지노 선을 중심으로 한 [[고정방어]] + 수세적 방어 전략을 취했다. 프랑스군의 전차들은 분명 1930년대 독일 전차들과 비교하면 월등히 우수했지만 무전기 미탑재를 비롯한 여러 문제들이 산재해있었고, 더군다나 방어선에 차려진 요새들 역시 독일군이 뚫기 불가능하다싶을 정도로 단단했던 것도 매한가지였으며, 벨기에 지방은 [[에반-에마엘 요새]]의 존재로 인해 뚫리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에반 에마엘 요새는 공수부대에게 너무나 빠르게 무너졌고[* 여기에는 에반 에마엘 요새를 설계한 회사들 중 독일 회사가 있었던 것도 한몫했다.이로 인해 요새의 설계도와 내부구조가 전부 독일측에게 넘어가 버렸고, 이 귀중한 정보를 바탕으로 독일군 공수부대는 에반 에마엘 요새와 비슷한 구조물에서 여러차례 모의훈련을 한 후 공격했기에 독일군은 손쉽게 요새를 장악할 수 있었다.] 전차의 기동전을 막을 유일한 방법이었던 기동방어나 공세적 방어 역시 전혀 실시되지 않으면서 프랑스는 패배하고 만다. [[파일:attachment/1024780021.jpg]] [[프랑스]] [[르노 B1|B1 전차]] [[전차 승무원|승무원]]이 두 손을 들고 항복하고 있다. 소위 전격전의 사례로 나열된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바르바로사 작전|러시아 침공]] 중 심리적 마비가 일어난 것은 오로지 단 한번, [[프랑스 침공|프랑스 전역]]에서 뿐이었으며, 그나마도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 전역에서의 심리적 마비는 독일군이 연합군 주력을 물리적으로 포위섬멸하기 위해 기동부대를 연합군 후방으로 돌진시키면서 예상치 못하게 일어난 '''부수적 효과'''였을 뿐이다. 이것은 1941년 초기 [[바르바로사 작전|러시아 전역]]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키이우|키예프]], 비야즈마, 비알리스토크, 브랸스크, 스몰렌스크, [[민스크]] 등에서 일어난 수차례에 걸친 대규모 포위섬멸전(Kesselschlacht)에서 [[소련군]]은 심리적으로 마비, 붕괴되지 않고 끝까지 저항했으며, 독일군 역시 이들을 회피하지 않고 격전 끝에 수십만명의 포로를 잡으며 물리적으로 소련군을 섬멸하면서 진격했다. 현재 알려진 전격전의 개념에 가까운 작전이 벌어진 사례 중 하나가 초창기 소련 침공인데, 기습이라는 걸 감안해도 바르바로사 작전의 손실비는 독일 1 : 소련 20 이었으니 단기 전술적 성과는 독일이 확실히 앞서긴 했다. 그러나 막상 여기서는 결과적으로 독일군이 예상한 전략적 [[모스크바|목]][[A-A선|표를]] 달성에 실패하고 아프리카, 프랑스 등에서의 승리를 통해 축적된 군사적 우위를 잃어버렸다. 당시 독일군의 전술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은 [[헤르만 호트#s-4|이 문서]]를 참조. [[파일:attachment/Himmler_visting_a_POW_camp_in_Minsk.jpg]] 민스크에서 잡힌 포로를 살펴보는 힘러 영국의 J.F.C. 풀러나 바실 [[리델 하트]]의 저작이 독일군의 전격전 교리 성립에 크게 기여했다는 통설 역시 완전한 허구이다. 풀러의 Plan 1919가 독일과 소련에서 주목을 받기는 했으나 그것은 전적으로 대규모 기갑부대 운용을 실제 야전훈련과 부대편성으로 현실성있게 구현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은 것뿐이지 그 사상이 무슨 대단히 혁신적이고 선구적이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다. 그 정도의 이론은 세계 각국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리델 하트의 저작은 아예 평균 이상의 주목을 받았다는 사료적 근거가 거의 없다.[* 사실 나무위키의 전격전 문서와 해당 인물 문서에서 헛소리꾼 정도로 평가 절하되고 있지만 많은 군사 전문가나 군인들 사이에서 군사 이론가로의 리델 하트의 지위는 확고하다. 물론 당대에도 매우 유명했다. 전격전의 전설 책 발매 이후 거품드립과 함께 반작용으로 까이고 있긴 하지만.][* 상술했듯 기동전에 전차를 적용시키는건 아무나 했지만, 그걸 이론에서 현실로 이끈건 분명 그와 그의 저작이 가지는 큰 공이다.] 그리고 [[소련]]은 1차 대전 이후 [[적백내전]]을 겪으면서 [[미하일 투하쳅스키]]의 주도로 독자적인 교리를 거의 완성해나가고 있었으며 [[스탈린]]의 대숙청 기간동안 잠시 부정되었지만 결국 그것을 다시 부활시켰다. 이를 '''[[종심작전]]'''[* 번역에 따라 '종심전투이론', '종심전투교리'라고도 한다. 당장 위키에서만 봐도 각 문서에 따라 세가지 용어가 혼재되어서 사용되고 있다.]이라고 하며, [[독소전쟁]] 후반기에 소련이 써먹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것 때문에 종심작전이론을 "소련식 전격전 이론"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소련이 독일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독일의 전격전 전에 이미 확립되어 있었던 이론이다. 소위 전격전은 사실 따지고 보면 기계화부대와 [[항공기]]라는 신무기를, 그 뿌리가 [[프로이센]]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고전적 독일식 [[기동전]]에 성공적으로 접합한 것이다. 이것은 위에서도 설명되었듯 독일군의 '섬멸'과 '포위', 그리고 '기동'에 대한 집착에서도 아주 잘 드러난다. 사방이 적국에 둘러싸인 프로이센, 그리고 독일의 지정학적 특성상 독일군은 언제나 자군보다 강력한 적과의 [[양면전쟁]], 혹은 다면전쟁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군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세 가지 원칙을 [[슐리펜 계획|집요하게 발전시켰다]]. '기동'과 '포위', '섬멸'이다. 말하자면, 신속하게 '기동'해서 우선 하나의 적을 '포위', '섬멸'하여 전열에서 완전히 탈락시키고, 다시 신속하게 '기동'해서 또 하나의 적을 '포위', '섬멸'하는 방식으로 1:2의 절대열세를 두 차례의 대등한 1:1 전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그러나 현재의 전격전 항목에서도 전격전 자체가 하나의 허구 또는 가공의 개념으로 까이는 것 처럼 프리드리히 대왕의 전쟁수행 방식에 있어서 논란이 있다. 20세기 초반까지 독일 군사학계에선 프리드리히 대왕이 "섬멸"에 집착하여 기동전을 구사했다는 것이 통설이었다. 이때만 해도 프리드리히 대왕이 섬멸이 아니라 '소모전'을 추구했다는 주장이 나오면 비군인 아마추어의 주장이라 씹혔지만 현재에 와서는 그 평가가 뒤집어지고 있다. 애초에 전쟁수행 방식을 하나로 평가하여 비결을 알아내려는 것은 일종의 신화에 가깝다.] 유구한 역사의 독일식 기동전은 1차대전기에 화력 팩터가 기동 팩터에 대해서 결정적 우위를 잡으면서[* 1차대전 중기까지는 [[철조망]]과 [[기관총]]으로 보호되는 적군 방어선을 돌파할 기동수단이 전무했다. 포병의 발달로 고전적 기동전의 핵심인 기병은 무력화되었으나, 이를 대체할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고착화된 [[참호전]]과 무제한 [[소모전]]으로 흐른 것이다. 한때 [[독가스]]가 이런 교착 상태를 타계할 수단으로 각광 받았으나 기술적 불안정과 상대방도 독가스 뿌려버리면 된다는 점 때문에 현대전의 끔찍한 악몽과 같은 모습만 남겼지 실질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이 상황을 타개한 것은 전쟁 말기 등장한 현대판 기병인 전차와 항공기이다.] 잠시 사라졌으나, 기술적 발전으로 다시 기동 팩터가 우위를 잡자 1940년대에 화려하게 부활한다. 이런 수백 년에 걸친 역사의 독일식 기동전을 누군가가 가르쳐 줬다거나 기발한 새로운 전술이라거나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다. 결국 전격전은 2차대전 독일군의 전쟁 수행방식이 아니라 영미 군사학계의 가공의 개념일 뿐이었다. 결국 현재 전격전이 2차대전 때 존재했던 전쟁수행방식이라는 통설은 깨졌고 애초의 민간인 기자의 의도대로(?) 화끈한 기동으로 전과를 확대한다 정도의 일반 명사로만 남아있다. >(…) 전격전은 어떤 정책도, 경제적 수단도 아니었으며, 군사 교리는 더더욱 아니었다. (…) 전격전은 하나의 결과, 또는 아마도 그 결과의 사후 기술에 지나지 않았다. 전격전은 전술적이거나 작전적인 하나의 체계가 결코 아니었다. >-전격전이란 무엇인가? Hughes, Daniel J. 1996. Blitzkrieg. (ed.) Franklin D. Margiotta. Brassey's Encyclopedia of Land Forces and Warfare. Dulles : Brassey's Inc., 1996, pp. 155-162. >전 세계 국가들이 독일군의 새로운 전쟁수행방법(전격전)을 연구하고 있으나, 그런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전쟁이란 항상 임기응변으로 수행해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전역 종결 직후 독일군 총참모장 프란츠 할더 장군, 일조각, 카알 하인츠 프리저 저, 진중근 역, 2007, <전격전의 전설> 29쪽에서 재인용. 관심이 있다면 칼 하인츠 프리저가 쓴 [[전격전의 전설]]이라는 책을 참고하면 좋다. 상당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 국내에서 전격전이 실존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대부분의 논지들은 이 책에 근거를 두고 있다. 물론 해당 책에도 일부 사실적 오류가 존재하며, 다른 의견도 엄연히 있다는 점에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 최종적으로 요약한다면 독일군의 기갑 전력이 적들의 기본 방어선을 격파하거나 우회하여 후방을 격파하고 움직이는 기동, 그리고 그 돌파된 부분으로 보병들이 밀어닥치는 마무리 방식 자체는 실제로 역사에서 벌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독일군이 의도한 것도, 계획한 것도 아니었으며, 애초에 계획이나 교리라고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부터 의문을 표해야 할 상식적인 움직임일 뿐이었다. 즉 전격전이라는 것은 독일군이 자랑하는 [[하인츠 구데리안]]과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정립한 전차 교리가 만든 일종의 현상일 뿐, 실제로 계획된 것도,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으며, 독일군이 갖고 있는 교리는 기갑 전력이 선행하여 적들의 방어선을 비집고 들어가 구멍을 낸다는 것뿐이었다. 구멍이 생겼으니 거기로 보병이 진입하는 것은 계획하거나 작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벌어질 수밖에 없는 현상이었고, 일단 안으로 비집고 들어간 기갑부대는 놀고먹을 수 없으니 그냥 돌아다니며 보이는 대로 교전을 벌인 것 뿐이었다. 즉, 전격전은 '''기갑의 기동 전략이 낳은 하나의 현상'''일 뿐, 실제로 존재했던 교리도 아니었고 독일군이 이런 걸 고려한 것도 아니었다. 위 책과는 상관없지만, 보통 생각하는 전격전 비슷한 것을 가장 잘 구사했던 건 다름 아닌 당시 [[미군]]이다. "선두부대는 최대한 후방으로 진출하는 것이 목표일 뿐, 적과의 교전은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말하자면 속도가 핵심인 기동전"이라는 위의 언급은 오히려 당시 미군 기갑부대 교리에 딱 들어맞는 것이었고, 이는 44년 이후 서부전선에서 [[조지 S. 패튼]]의 진격에서 전형적으로 전개된다. 패튼이 어찌나 이 교리에 충실했던지 교전을 회피하다 못해 적을 그냥 방기하는 게 아니냐는 평가까지 있었을 정도. 오히려 역으로 이 때문에 그 뒤를 따르는 연합군 보병부대의 뒤치다꺼리는 뒤치다꺼리 수준을 한참 뛰어넘는 치열한 소탕전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2차 세계 대전 후기 서부전선 기록을 읽어보면 분명 큰 작전이나 전투는 하나같이 다 미군이 이기는데, 소대급이나 중대급의 소규모 소탕전 전투에서는 미군이 고립된 독일군에게 괴멸당했다는 기록도 자주 발견된다.] [[태평양 전쟁|지구 반대편의 태평양 전역]]에서의 미 해군 역시 중요한 섬만 점령하고, 나머지 섬들은 보급선만 틀어막고 방치해버리는 양상으로 해역을 점령해나갔다. 이쪽에서는 보급선을 틀어막은만큼 일본군은 굶어 죽거나 현지에서 둔전을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론상 이런 상황에서는 당연히 해군이 나서서 보급선을 뚫어줘야 하나, 당시 일본 제국 해군은 미 해군에게 신나게 털리고 있던 터라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거기에 육해군 대립도 심각했기에 해군이 육군을 돕는 상황 자체가 잘 안 일어났다.] 육지에서나 바다에서나 이런 전략을 펼칠 수 있는 건 전역을 빠르고 넓게 기동하면서도 [[쇼미더머니|탄탄한 보급선을 유지해주는 능력]] 덕분이었고, 그럴 형편이 되지 않는 나라들은 힘든 일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