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문단 편집) === [[노동자 대투쟁]]이 몰고온 변화의 바람 === 1987년 대한민국은 끝끝내 민주화를 이루어 냈지만, 이는 말 그대로 법적인 의미의 민주화였지 노동, 시민사회, 언론 전 분야에서 독재정권의 독버섯같은 잔재가 남아있었다. 이미 1970년대부터 [[전태일]]의 희생을 바탕으로 곳곳에 방직, 섬유피복, 여성 생산직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가 건설되었지만, 이중 2~3년 이상 가는 곳은 몇 곳 되지 않았고 전국적인 노동조합의 건설은 꿈에도 꾸지 못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민주화 운동이 성공으로 끝나고, 여기저기에서 억눌렸던 진보적 요구가 폭발하면서, 그중 가장 억눌렸던 계층, 노동자들의 각성이 시작되었다. [[6월 항쟁]]이 끝난 직후인 1987년 7월, 최소 생존권을 보장받기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이 열린다. ||[[파일:external/www.usjournal.kr/cb8975d618bd9e6278c9f503b194efc6.jpg|width=350]] || || [[노동자 대투쟁]]의 막을 올린 현대 그룹 노동조합의 가두행진 || 울산 권역에서 비밀리에 시작된 현대차 민주노조 건설운동이 탄압 국면을 맞자, 7월 5일부터 시작된 노동자들의 파업이 창원, 마산을 거쳐 계속해서 북쪽으로, 북쪽으로 확산되어갔다. 전국적으로 3천여회의 파업이 일어나, 하루에 40회가 넘는 동시 파업이 이어졌으며, 겨우 4천여개에 불과하던 노동조합은 이후 7천 1백여개가 되었고, 노조 조합원의 수는 180만명으로 전해의 두배, 노조 조직화율은 거의 20%에 육박했다.[* 이는 현대 미국에 가까운 정도의 조직화율으로, 당시 전 세계 진보 좌파 정당과 노조들에 비교해도 많이 꿀리지 않을 수준이었다. 서구의 노조운동가들이 한국의 열정을 본받고 싶어했을 정도..] 하지만 8월 28일경 노조운동을 하다 사망한 [[이석규]] 열사의 장례식에 [[백골단]]이 투입되는 것을 기점으로 진압은 강경 일변도로 변했다. 정권이 안정되자 언론도 다시 대기업의 편을 들어 노동자들을 연신 과격, 좌익용공집단으로 매도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언론에 노출되어 조금씩 노동운동에 등을 돌렸고, 심지어는 [[민주당계 정당]]들 마저도 집회의 자제를 요구하며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 [[파일:00744969_0001.jpg|width=350]] || || [[이석규]] 열사의 장례식 || 그러나 노동운동의 성장세는 뚜렷했다. 노동자 대투쟁의 경험으로 양적으로 엄청나게 성장한 노동운동은 이제 산별, 점조직별 민주노조 건설 운동을 넘어 전국적이고, 진보적인 민중과 연대할수 있는 새로운 상설 합의체를 갈망하기 시작했다. 이 갈망이 바로 '''전국적 민주노조 건설운동'''으로 계승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