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문단 편집) === 눈보랏길 속의 전진 === 출범하자 마자, 전노협은 엄청난 탄압에 직면했다. 출범일인 1월 22일부터 그해 6월까지, 900여명의 남은 대의원 가운데 262명이 체포되고 10여명이 수배되었다. [[국제노동기구]]는 전노협 창립을 폭력적으로 방해한 대한민국 정부를 비판하고 시정조치를 권고했지만, 노태우 정권은 이를 들을리가 없었다. 전노협은 3당합당 저지, 노동법 개악 저지를 모토로 그해 2월부터 6월까지 대규모 연좌 단식과 파업을 진행했다. 정부는 전노협 산하 160개 노조에 경찰병력을 투입해 압수수색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에도 전노협의 세는 점차 불어났고, 1990년 끝 무렵에는 20만 조합원과 600여개의 단위노조를 거느린 거대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노태우 정권이 강행한 3당 합당, 임금 억제와, 공안 정국등으로 서민, 화이트컬러층도 전노협에 긍정적인 쪽으로 돌아서며, 언론과 방송도 방송 민주화 투쟁으로 전노협에 화답한다. 그러나 계속된 탄압은 전노협의 조직력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1991년경 100여개에 가까운 전노협 산하 노조가 정부의 탄압으로 해산하거나, 전노협에서 탈퇴했고, 1991년의 대기업 업무조사로 현대, 대우등의 대기업 노조들이 간부를 잃었다. 1993년까지 체포된 노동자들의 수는 총 1,973명에 이르렀다. 심지어 제 3차 전노협 결의대회는 대부분의 대의원이 구속되어있던 관계로 인하여 구치소에서 개최되기까지 했다. 조금씩 전노협의 활동력은 떨어져가고 있었다. 그 방향성도 '''합법적 민주노조의 결성''' 인지, 아니면 '''변혁적 노동해방의 실천'''인지 확실하지도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기업별 노조, 지역별 노조 그대로 활동하며 산업별 노조로 확장시키지 못한다는 문제점또한 내부에서 제기되었다. 1991년부터 2천여명이 넘는 구속자와 5천여명이 넘는 해고자를 낸 거대한 전노협 투쟁은 골리앗 크레인 파업과,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마창노련]]의 파업 실패, [[단병호]]와 문성현 등 수십명의 지도부가 구속되는 1995년을 기점으로 조금씩 막을 내리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