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문단 편집) == 역사 == [kakaotv(28537437)] 6월 항쟁과 전대협 결성 1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1997) 1986년 [[10.28 건국대 항쟁]]으로 1300여 명이 구속된 후 비합법 지하서클 중심의 학생운동세력은 민주화 투쟁을 거쳐 선도 투쟁에서 대중 노선으로 변화를 꾀하기 시작하여 전국적인 연대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 전까지는 각 대학교의 지하 서클(이를 "언더티"라고 한다)들을 중심으로 연합 조직이 결성되어 있었고, 이를 중심으로 연합 시위나 선도 투쟁을 하는 형식이었다. 1970년대 까지는 거의 학교별로 조직되어 필요할 때만 연계되는 형식이었고(그 시절까지 대학생 숫자가 극히 드물었던 것도 한몫했다), 대부분 서울대 중심이었다. 그러나 80년대에 대학 정원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보다 본격적인 연합체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흐름은 [[무림-학림 논쟁]]이나 [[학림 사건]], [[MC-MT 논쟁]] 항목에서 잘 볼 수 있다.] 그리고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4.13 호헌조치]]로 불붙기 시작한 민중 투쟁은 전국적인 학생운동 진영인 '전대협' 결성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해 [[6월 항쟁]] 중에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한열]]의 장례를 위해 7월 5일 [[연세대학교]]에서 전국의 학생회장이 모여 회의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전국적 학생 대중 조직 건설에 대해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리고 8월 1일 서울지역 대학생 대표자 협의회(서대협) 의장 [[이인영(정치인)|이인영]]의 주도로 [[고려대학교]]에서 '제1회 전국 대학생 지역대표자 연석회의'를 시작으로 총 세 번의 회의를 거쳐 전대협은 탯줄을 끊고 세상에 나오게 된다. [[파일:external/archives.kdemo.or.kr/00740849_0001.jpg|width=550]] 1987년 전대협 발대식 모습. 그리고 8월 19일, 충남대학교에서 전국 95개 대학에서 모인 3,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기 전대협 발대식을 열었다. 전대협은 발족 선언문에서 ●외세 배격과 독재 종식을 통한 자주적 민간 정부의 수립, ●조국의 자주적 평화 통일에 기여,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을 향한 연대, ●학문•사상의 자유 쟁취, ●전국학생총연합(전총련) 건설의 토대 마련 등 다섯 가지를 활동 목표로 내걸었다. 전대협은 1987년 공정선거감시단 활동과 [[13대 대선]] 투쟁[* 다만 이 과정에서 후보 단일화([[김영삼]])와 비판적 지지([[김대중]]), 민중 후보([[백기완]])으로 나뉘어져 어려움을 겪었다.], 1988년 6 ·10/8 ·15 남북 학생회담 시도[* 그해 8월 15일 판문점 진입 당시 누워서 행진하는 사진으로 알려진 그 사건.], 전두환-이순자 부부 체포 결사대 활동 등으로 국민들의 호응을 얻었으나, 1989년 봄부터 [[문익환]] 목사의 무단 방북 사건을 계기로 [[공안정국]]이 조성되고 그 해 [[5.3 동의대 사태]]를 계기로 화염병 처벌법이 제정된 후 6월 30일에 [[한양대학교]]에서 열린 평축 출정식 당시에 인문관에서 고립 농성하다 수천여명이 구속된 것을 비롯해 수많은 학생들이 무더기로 구속/수배를 당했고 특히 [[설인종 고문치사 사건]]의 여파로 전국 140여 개 대학에서 열린 총학생회 선거에서 [[비운동권]] 학생회장들이 당선되면서 NL-PD-비운동권 삼각 구도를 형성하게 된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991년 시위 도중 명지대학교 학생 [[강경대]]씨가 경찰의 토끼몰이 유혈 진압 때문에 사망하는 사건을 계기로 [[6월 항쟁]] 때처럼 정권 타도를 외치면서 거리를 뒤덮었으나 [[정원식]] 총리 밀가루 투척 사건,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 시인 [[김지하]]와 [[서강대학교]] 총장 [[박홍(종교인)|박홍]] 루카 신부의 운동권 비난 발언[* 민주화 운동으로 오랜 옥고를 치뤘던 김지하 시인이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칼럼을 게재한 것이 결정타였다. 당시 강경대의 사망 이후 각계각층에서 연쇄 분신이 일어났는데, 김지하 시인이 이걸 모두 운동권 조직들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물론 근거는 없다...강기훈 유서대필 조작도 이런 김지하의 강변을 정권에서 이용하면서 촉발된 것이다.]으로 여론이 급반전하고 6월 20일 광역의회 선거에서는 민자당이 당초 열세였던 서울시의회, 경기도 의회, 인천시의회 선거에서 과반을 넘게 가져가며[* 다만 당시 평민당과 민주당이 91년 지방선거에서 노태우 정부에게 극도로 부정적인 여론을 믿고 단일화 작업 없이 따로따로 후보를 낸 것도 크기는 했다. 그래도 광역의원 선거에서 야권이 수도권에서 압승을 거둘 수 있었던 선거를 전대협의 뻘짓으로 날려먹었다는 분석은 달라지지 않기는 하지만. ] 투쟁은 실패로 돌아간다.[* 당시 분위기는 거의 정권 타도 직전까지 갔었다고 평가된다. 실제로도 [[3당합당]] 이후로 노태우 정권과 민자당의 인기가 낮다보니까 1991년 지방선거에서 수도권을 내주는 것 아닌가하는 얘기가 오갈 정도였다. 하지만 6월 항쟁 때와는 다르게 [[넥타이 부대]]로 상징되는 사무직과 자영업자층이 움직이지 않으면서 실패했다. 3저 호황과 서울올림픽의 성공으로 두터워진 [[중산층]]이 급진적인 혁명보다는 제도 개혁을 선호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정원식 밀가루 투척과 강기훈 유서대필 의혹이 학생운동의 정당성에 치명타를 입혔다. 다만 강기훈 유서대필은 결국 정권의 조작으로 밝혀졌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지 오래. 그리고 정원식 밀가루 투척은 누가 뭐래도 쓸데없이 벌인 뻘짓이었다.] 결국 1992년 총/대선 정국에서도 크게 힘을 쓰지는 못했고 전대협 7기 당시인 1993년 3월 [[경희대학교]]에서 대의원대회를 통해 전대협을 해체하고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건설 준비위원회’를 발족하기로 결의하며 전대협은 자진해산하였다. 이후의 역사는 [[한총련]] 항목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