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국실업축구연맹전 (문단 편집) === 출범 이후 === 1964년 제일모직, 병참단, 해병대, 대한석탄공사, [[경주 한수원|한국전력]], 금성방직, [[대한중석 축구단|대한중석]], [[경찰 축구단|서울시경]], [[상무 축구단|방첩대]], [[대전 한국철도|철도청]]의 10개 구단으로 원년 리그가 구성되어 첫 대회를 치뤘다. 기본적인 전국실업축구연맹전의 포맷은 오늘날 남미의 여러 리그와 비슷한 '''춘계''', '''추계'''의 전후기 리그 형식이었다. 춘계 대회는 대체로 4월~5월에, 추계대회는 9월~10월에 열렸다. 처음에는 춘계와 추계 우승팀은 각각 모두 그 해의 리그 우승팀으로 인정되고 따로 챔피언결정전 같은 개념은 없었으나, 70년대에 12월에 치르는 왕중왕전 개념의 대회를 몇 년간 유지한 적은 있었다. 다만 춘계 우승팀과 추계 우승팀만의 대회는 아니었고, 겨울~초봄에 치르는 대통령배 축구대회 우승팀, 여름에 치르는 전국축구선수권 우승팀까지 총 4개 팀이 토너먼트 형식으로 대회를 치뤘다. 이후 80년대에 이 대회는 폐지되었다. 한 해 춘계리그와 추계리그 중 한 리그만 나가는 팀도 있었고, 선수부족을 이유로 협회 등록팀이 리그가 아닌 컵대회만 나가는 경우도 허다했다. 대회 방식도 자주 바뀌어서 월드컵 형식의 조별리그-토너먼트 형태로 대회가 주로 치뤄지다가 잠시 단일리그를 실시하기도 했고, 1983년 [[K리그|수퍼리그]] 출범 때에는 [[K리그|수퍼리그]]와의 연계를 꾀하며 1~2부 자체 디비전 시스템을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본 뼈대는 '''조별리그-토너먼트''' 형식이었다. 1960년대 10개 팀 미만의 소규모로 운영되오던 리그는 1969년 '''금융단축구협의회'''가 창설되고 이들이 금융단 축구리그를 만들면서 전환점을 맞게 된다. 두 리그는 상호 경쟁체제를 형성하며 서로 운영되다가 1969년 대통령배와 전국축구선수권에서 금융단 리그 팀들이 압도적인 우세를 보여주면서, 기존 실업팀들에게 큰 위협감을 심어주었다. 결국 실업축구연맹이 협상을 통해 금융단 축구팀들을 실업축구연맹에 가입시키는데 성공하고 1970년 추계대회부터 리그는 18팀 규모로 급성장하게 되었다. 은행팀의 막강한 자금력과, 선수 은퇴 후 은행직 보장의 안정성까지 겸비한 금융단 축구팀들은 리그에서 강호로 금방 자리잡았고, 우수선수들을 많이 확보한다. 리그의 최대 약점이자 숙원사업은 바로 연고지제도 도입이었다. 기업위주, 특히 금융권 팀들이 많았던 당시 리그 상황에 서울지역에 팀이 당연히 편중될 수 밖에 없었고, 춘계, 추계 대회를 비롯한 실업축구대회는 대부분 [[효창운동장]]과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릴수밖에 없었다. 연간 리그의 기초 조건인 '''홈 앤드 어웨이'''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문제점을 실업축구연맹이 모르고 있진 않았으므로 1972년 추계대회때 참가팀들에게 연고지를 배분해 연고제도를 시험적으로 실시하기도 했고, 1975년부터 지속적으로 풀리그 대회방식 도입을 시도했다. 1980 시즌에는 서울리그, 강릉리그, 부산리그, 춘천리그로 조마다 지역을 배분해 결선리그를 서울에서 모여 치르는 방식도 시도하는 등 나름 노력했으나, 연고지제도의 정착이 안된 상황에서 이 방식들은 오래갈 리가 없었고, 1982년 겨우겨우 '''코리안리그 1부''', '''코리안리그 2부'''로 자체 승강제를 슈퍼리그와 연계할 목적으로 실시했으나 이마저도 1년만에 접게된다. 연고지제도는 2003년 [[한국 내셔널리그|K2리그]]로 재출범하고 나서야 비로소 완성하게 된다.[* 물론 진정한 연고지 정착까지는 또 몇년이 걸렸다.] 그래도 1983년 [[K리그|수퍼리그]] 출범 이후에는 충실히 하부리그의 역할을 했다. 1983시즌 코리언리그에서 [[한일은행 축구단]]이 우승해 어찌보면 대한민국 축구 최초의 '''승격팀'''으로써 다음 시즌 [[K리그|수퍼리그]]에 참여할 권리를 얻었고, 1984시즌에도 [[상무 축구단]]이 코리언리그 우승을 달성하고 1985년부터 [[K리그|수퍼리그]]에 합류해 활동했다.[* 이 때 수퍼리그 원년팀으로 참가했던 [[국민은행 축구단]]이 최하위에 머물러 일종의 '''강등'''을 당해 1985시즌부터 다시 실업축구연맹전을 소화했다.] 1987년 [[K리그|수퍼리그]]가 온전한 프로팀만의 리그로 전환된 뒤 1988년부터 [[K리그 드래프트|드래프트]]를 실시하면서 선수들의 직업선택적 불만이 많이 쌓였고, 그때마다 프로 대신 드래프트를 거부하고 실업팀에 입단하는 선수들이 종종 있어왔다. [[김대의]], [[김태영(1970)|김태영]], [[박건하]] 등 국가대표급 선수들이 이렇게 실업축구연맹전에 데뷔했고, 이들은 이곳에서 실전경험치를 먹고 [[K리그]]로 향했다. 하지만 1997년 대한민국을 휩쓴 IMF발 외환위기 때문에 당시 실업축구의 중요 뼈대였던 금융단 팀들의 연쇄 해체로 인해 리그는 10팀 이하로 쪼그라들어버려 실업축구 무용론까지 나오고 만다.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1997년부터 프로팀 2군의 참가를 허용하기도 했으나 2000년 프로 자체 2군리그인 [[R리그]]가 창설되며 미봉책에 그쳤다. 2000년대 초 경기회복이 되며 [[충주 험멜|험멜코리아]], [[울산 현대미포조선|현대미포조선]] 등의 기업구단이 창단되고 활력을 찾는 듯 했지만, 이후 2002년 한일월드컵 4강진출을 계기로 프로축구 확장이 대세 여론이 되었고, 기존의 춘계, 추계 단기대회 방식으론 한계를 느낀 실업축구연맹이 향후 프로 2부화를 목표로 [[한국 내셔널리그|K2리그]]를 출범하며 전국실업축구연맹전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