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전라도 (문단 편집) === [[원삼국시대]] === '후한서'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록된 "마한은 서쪽에 54국, 진한은 동쪽에 12국, 변한은 남쪽에 12국이 있는데, 마한이 가장 강대하다", 역시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록된 "마한으로부터 가야의 뿌리인 변한과 신라의 뿌리인 진한이 갈라져 나왔다"는 [[마한]]의 땅이었다. 마한 연맹의 54개 국가들 중에서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를 중심으로 세력을 떨친 [[건마국]]과 [[침미다례]] 등이 포함되는 것으로 추측되는 [[영산강]] 유역 세력을 포함한 지금의 [[전라남도]] 지역까지 대략 25개 국가가 전라도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신미, 심미다례 혹은 침미다례는 영산강 유역 중에서 해남 일대의 백포만 지금의 군곡리 지역으로 추정되는데, 구체적으로는 해남읍 화산면, 현산면, 계곡면 일대로 추정된다. 침미다례 위치는 강진, 남해, 제주도로 보는 설도 있고, 침미다례 위치를 근처 강진으로 추정되는 고해진을 근거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사실 고해진 위치 자체도 확실치는 않다. 영산강 유역 중에서는 해남 백포만 일대로 추정하는 설이 유력하다.[* 침미다례를 전남 해남으로 추정한 최초의 인물이 쓰다 소키치 와세다 대학 교수로 친일논란에서 자유롭지 않은 역사학자 이병도의 지도교수였던 인물이고, 전남 강진으로 추정한 최초의 인물이 경성제대 교수이자 조선사 편수회 간사였던 스에마쓰 야스카즈였으며, 침미다례를 전남 해남, 강진 일대 영산강 유역 세력으로 추정하는 논문의 저자들이 '한국고대사학회'에서 이러한 사조를 이어받은 회원들이라는 점에서 의구심을 표하는 이들이 있으나, 일제 식민사학자가 연구한 논리라고 해서 다 부정하는 건 옳지 못한 견해다.][* 대표적인 예가 삼국사기 초기 연대에 대한 의문제기인데 물론 5세기까지 삼국사기 기재 내용을 죄다 부정한 논리는 오늘날에 와선 국내 사학자들의 꾸준한 논파로 웃음거리로 전락한 상황이지만, 적어도 2~3세기 부분에 대한 기년 오류나 삼국간 상호작용이 어딘가 맞지 않는 부분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해남 군곡리가 신미국이란 학설은 현대 한국 고고학자들 및 사학자들의 연구 결과며, 해남 군곡리 신미국 세력이 근고초왕 및 동성왕~무령왕 때 두 번이나 철저하게 백제의 무력 응징을 받아 끝내 몰락해버린 사실은 일본 식민사학자들과는 무관한 국내 고고학자들 및 사학자들의 연구 성과다. 지금도 국내 사학자들은 영산강 유역 세력이 일본 전방후원분 세력이라는 일본 사학자들의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고고학으로 입증된 사항마저 이병도나 스에마쓰가 일부 주장한 내용과 같다고 다 부정하면 한국사학은 성립이 불가능하다. 이런 비뚤어진 민족주의적 사고방식이 오히려 일본사학계에 트집을 잡힐 수 있는 약점이 될 수 있다.] 초기 마한 맹주국은 [[기원전 190년]] 경 [[고조선]]으로부터 내려온 세력이 건국한 건마국이었다. 문헌 사료와 고고학적 근거가 맞긴 맞지만 기년이 틀린 경우가 잦은 백제나 신라의 경우와는 달리, 유독 건마국 같은 경우는 건국 세력의 고고학적 남천 시점과 [[준왕]]의 문헌학적 남하 시점이 거의 일치하는 정말 흔치 않은 경우. 한편 건마국이 건국되면서 전라도 일대에는 중요한 변화가 발생하게 되는데, 전북 익산, 전주, 군산 일대에 위만조선이 싫어서 내려온 한씨조선 유민들이 익산 건마국을 중심으로 응집하며 주변 토착민들에게 강력한 위계체제를 관철한 결과, 이들의 통제를 따르기 싫었던 송국리형 유형 문화 주민들이 대거 전남 남서부 일대, 즉 훗날 침미다례로 발전하게 될 지역으로 빠져나가고, 그냥 전북에 남았던 여타 토착민들은 별 수 없이 건마국의 정치적 지배를 받아들이는 양상이 드러난다. 이후 위만조선이 망하자 또 다시 중대한 변화가 전라도에 일어난다. 위만조선이 망한 후 대규모로 남하한 조선계 유민들이, 도저히 알 수 없는 이유로 전북 일대에는 정착하지 못하고 대부분 그보다 거리가 먼 침미다례에 정착하게 되는 사실이다.[* 고고학계에서는 더 이상의 발언을 삼가지만, 현재 추측되는 사유로는 위만조선 일파에게 여전히 큰 반감을 갖고 있었을 준왕계 건마국 세력의 강력한 비토권 행사 외엔 다른 이유가 없다. 비슷한 시기에 경주 사로국 일대로 이주한 위만조선 유민들은 박씨 족단이 나타날 때까지는 서로 융화하지 못했을 망정 기존 한씨조선 멸망 당시 먼저 정착했던 부류들과 그럭저럭 어울려 지냈던 것과 크게 대조되는 양상이다.] 이렇게 되다보니 '''침미다례는 아예 애초부터 건마국을 필두로 한 전북 마한 세력과는 여러모로 연합이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 된다.''' 전북 마한 세력 입장에서 보았을 때, 침미다례는 준왕의 지배를 받아들이길 거부했던 토착민 집단과, 준왕 세력을 조선에서 쫓아낸 바 있는 위만조선 후예들이 연합해서 세운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중 건마국은 기원후 [[3세기]] 시점에서는 현재의 [[충청남도]] [[천안시]] [[청당동]]에 자리잡은 걸로 유력하게 추정되는 [[목지국]]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었고, 침미다례 내부에선 위만계 고조선 세력이 토돈분구묘계 세력 및 송국리 문화 유형계 주민들을 누르고 주도권을 잡게 된 반면 기존 건마국 내부에선 준왕이 처음 등장했을 때엔 주도권을 내주면서 피지배층 입장이었던 토돈분구묘계, 송국리 문화 유형계가 오히려 주도권을 잡게 되는, 상당히 묘한 상황이 등장하게 된다. 한편 이 전라도의 마한 거수국들이 천안 목지국 세력과 맺었던 관계는 묘한데, 아무래도 목지국이 이들에게 훗날 백제가 행사했던 간접 지배력은 행사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목지국의 영향력은 분명 무시할 수는 없으되 훗날 등장하는 백제에 비하면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마한이라는 연맹체에는 크게 보아 한강~임진강 유역, 안성천 일대, 금강 유역, 영산강 유역, 섬진강 유역 등 다섯 유역으로 분류해 볼 수 있고, 그 영향력은 목지국만 못 했던 걸로 추정되지만 금강 유역과 영산강 유역 역시 나름 세력이 있었기에 그 지역들에는 그렇게까지 크게 미치진 못 했던 걸로 보인다. 섬진강 유역은 세력은 미약했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목지국이 3세기 중후반 백제에게 소멸된 이후에는[* 최몽룡 서울대 고고사학과 명예교수는 목지국이 소멸한 것이 아니라 이동하여 예산, 익산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나주 반남면 일대에 마지막 근거지를 뒀다는 가설을 제시하였으나, 이는 이미 십수 년 전 논파된 학설이다. 충청도 북부 일대가 주 세력권인 목지국이 어찌되든 그건 목지국에게 마한 수장국 자리를 빼앗긴 전북 건마국 세력 입장에선 아무래도 상관없는 얘기였으며, 오히려 경쟁 관계기에 옮겨갈 수 없었다. 그러니 목지국이 익산으로 옮긴다는 얘기는 더 성립불가지만 설령 그렇다한들 상술했듯 전북 마한 세력과 침미다례는 이해 관계 자체가 달랐던 데다 대립 관계는 더 심했고, 전북 세력은 광주 세력과 합세하여 백제와 더욱 친밀했으니 거기서 침미다례로 목지국이 이동한다는 건 더욱 성립불가다.] 백제가 목지국이 하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지만 백제는 목지국과는 꽤 지향점이 다른 고대 국가였다. 금강 유역은 적어도 [[4세기]]~[[5세기]]까지, 영산강 유역은 고유의 묘제가 [[6세기]]에도 어느 정도 유지된다.[* 물론 나주 복암리 고분 봉분들 크기가 크고, 부장품들도 금동신발, 은제장식, 장식대도 등 비상한 관심을 끄는 점도 사실이고, 신라도 지증왕 시기 즉 6세기 초까지 마립간 시대의 특징으로 대형고분들이 있었고, 백제 능산리 왕릉들도 2020년 문화재청이 실시한 지하물리탐사 결과 왕릉들의 크기가 훨씬 더 큰 것으로 밝혀지기는 했지만, 갈수록 한반도 전역에서 그 전 시기에 비해 무덤의 크기가 점차 줄어드는 단계에 들어가게 된다. 이는 세계적으로 공통되게 나타나는 현상으로 관료 체제가 확립되면서 왕의 무덤 크기와 왕의 권위가 일치하지는 않게 된다.][[http://www.yasinmoon.com/news/articleView.html?idxno=31594|#]] 다만 [[침미다례]] 등이 있었던 것이 유력한 영산강 유역 세력은 후기 마한 연맹체를 이끈 바 없으며, 굳이 후기 마한 연맹체의 영도국을 든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백제|백제국]]이다. 비록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지만 왜계 전방후원분(초기 횡혈식 석실분)[* 겉은 횡혈식 석실분인데 내부에는 영산강 유역에서 주로 보이는 옹관묘다.] 또는 가야 세력의 유물이 전남해안 일대에서 보이고 있으나, 여전히 백제의 영향력이 시간이 지날 수록 침투해가면서 영산강 유역 세력의 타지 진출을 제한하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이렇듯 마한이 백제에 편입되는 과정은 목지국을 대신해서 맹주국이 된 백제가 다른 마한 소속 연맹 국가들을 중앙 집권체제로 편입해가는 과정으로 봐야 한다.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를 바탕으로 이병도가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를 근거로 주장한, [[근초고왕]]이 마한, 즉 전라도 남해안 일대까지 모두 정복했다는 학설은 문제 있는 학설이었다.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 기록 자체가 왜의 한반도 정벌이라는 황당무계한 내용에 여기에는 또 왜의 신라, 가야 정벌 기록도 있는데 신라, 가야를 정벌했다는 기록은 외면하고 굳이 침미다례만 콕 집어 마한 전체를 정벌했다고 해석했던 게 그것. 다만 지명의 비정이나, 근초고왕 이후 고고학적으로 금강 유역 일대의 성장이 억제되는 점, 그리고 백제가 대방군(현재 황해도 일대)의 옛 교역 루트를 장악하는 데는 성공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백제가 영산강 유역의 해남 백포만 일대로 추정되는 신미-침미다례를 직접지배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옛 목지국이나 건마국보다 훨씬 강력한 지배력과 위상을 영산강 유역 세력권에게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건 무리한 추정이 아니다.''' 한성백제의 한성 공함 전까지 영산강 유역 세력은 무덤 부장품의 양이 꽤 줄어들고, 가야 세력도 침투에 서서히 성공해가는 전라도 동부에는 아예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데 이는 백제의 강력한 견제와 간섭 탓으로, 굳이 말하면 이는 그전 건마국이나 목지국은 아예 시도도 해볼 수 없었을 강권 행사였다.[* 백제의 마한 병합 과정은 신라의 진한 병합과정과도 비슷하지만 다른 면도 있었다. 애초에 마한의 영역 자체가 진한의 2~3배에 달하는 데다가 독자적인 수계가 있는 영역권들은 최소한 4~5개는 있었기에 사로국의 진한 병합과는 이 점이 꽤 달랐고, 처음에는 인접 지역에 대해 가급적 직접 지배를 관철하려 하였으나 범위가 멀거나 영산강 유역 같이 나름의 독자적 힘이 강했던 지역에 대해서는 중앙행정력의 투사력이 상대적으로 크게 떨어졌을 뿐이다.][* 경북 북부 지역인 의성,군위,상주,예천,안동,영주,봉화,청송 등지에서 출토되는 토기들은 경주 토기와는 다르고, 경북 북부 지역에서는 백제식 금동관, 환두대도 같은 백제 유물들이 출토되며 또한 고려에서 신라부흥운동도 경북 남부 지역에서 일어나고, 경북 북부 지역에서는 호응이 없었듯 전라도 지역과 마찬가지로 경상도 지역 심지어 경북 지역 내에서도 당시에는 단일한 집단이 아니었듯이 어차피 고대사의 견해들 자체가 어느 정도는 추측에 기반해서 이뤄질 수밖엔 없으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건 신미-침미다례 전체를 은연중 광주전남 혹은 전라도 전체로 비정하거나 혹은 아예 마한으로 보는 일각의 억지스러운 추측이다.] 이러한 설은 이병도가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를 근거로 주장한 이론으로만 주장하는 게 아니라, [[2000년대]] 후반에 충청남역사문화원에서 발간한 백제사 시리즈의 웅진백제 편에서 [[삼국사기]]까지도 고려하여 해석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