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라도 (문단 편집) === [[삼국시대]] === [[4세기]]부터 지금의 [[서울]]에 있던 [[백제]]가 남하하며 조금씩 백제에 복속되기 시작했고, 이 무렵에 [[대가야]]도 [[금강]] 상류와 [[섬진강]] 일부 유역에 진출하였다. 이 시기까지 전라도에는 제대로 통합된 국가가 없이 [[성읍국가]]만 난립한 상태였던 건 아니다. 전북 서북부 해안 일대는 백제가 아예 근초고왕 이전 시기까지도 직접 지배 영역을 굳혀 나가고 있었으며 이는 충청도 북부보다 백제의 진격이 빠른 경우였고, 전라도 서남부 내륙 일대는 건마국 세력을 중심으로 어느 정도 주변 소국이 응집하는 구도였는데 서부 내륙 일대는 전북 서해안보다는 직접 세력화는 늦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백제와 훨씬 타협이 쉬운 상태였다. 한편 나름 세력이 만만찮은 영산강 유역(=침미다례) 일대가 전남 서남부[* 광주를 비롯한 전남 서남 내륙부는 사실 침미다례와 계통이 같았으나, 백제가 침미다례를 제압하기 위해 일부러 광주 세력을 우대하면서 친백제 세력을 만들어 침미다례로부터 떼어냈다.]에서 세력을 이뤘고, 전라도 동부에서는 주로 진개의 고조선 정벌 당시 내려온 유민들로 구성된 세력이 각기 있었다. 즉 마한에 속했던 거수국들이 그저 생각없이 흩어져 있었던 게 아니라, 비록 고대 국가 체제는 이루지 못할 망정 각자 정치, 경제, 문화적 경계에 따라 나름대로는 응집해 있었던 것이다. 백제는 일찍부터 마한의 영역이었던 전라도 일대에 관심을 안 둘 수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이 일대를 장악해야 백제의 대방군 무역권 승계, 즉 경기-충청-전라-왜 열도의 무역망을 장악하게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장수왕]]의 한성 공함으로 당장 망하지 않기 위해선 호남 일대의 직접 지배화 프로그램을 더욱 서두르지 않을 수 없게 되긴 했지만 그전 한성백제라고 마냥 전라도 일대를 방치했던 건 아니었다. 적어도 개로왕 사망 직전까진 금강 유역 일대, 즉 전북 일대에 대한 직접 지배 영역은 상당히 넓어져 있었고, 그나마 가장 독자적 세력이 강성하여 적어도 근초고왕 재위기 초반엔 백제의 마한 수장국 자격에 정면 도전했던 영산강 세력은 아예 마한 운운하는 얘기는 입밖에도 꺼내지 못하면서 코앞의 전라도 동부 진출도 제어당하는 상태였다. 하지만 백제가 남천하면서 전라도의 백제화에 가속화가 붙었다는 건 어디까지나 그 이후 상당한 기간의 진행과정을 뭉뚱그린 결과론적 얘기다. 적어도 한성 공함 당시 백제의 국력과 위상은 급전직하로 추락한 상태였음을 잊어선 안 된다. 천안 목지국 휘하의 일개 거수국에 불과했던 백제국이 목지국의 국력 약화를 기회로 틈을 엿보아 성공했던 것처럼, 아직은 지배 기반을 해체당하지 않은 전라도의 옛 마한 거수국들은 각자 다른 선택을 하기 시작하며 풍전등화인 백제의 애간장을 더욱 태우게 된다.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선 건 다름아닌, 전라도의 옛 마한 거수국들 중 가장 강력했던 영산강 유역 세력, 즉 침미다례였다. 이 시기 나주 금동관[[대한민국의 국보|국보 제295호]]이 보다 화려해지는데, 이는 백제 내에서도 독자적으로 대중국 외교를 행하려 했던 데다, 신라, 대가야 그리고 심지어는 일본 큐슈 일대와 교역을 강화하며 힘을 키운 게 고고학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거꾸로 이 시기 대가야의 경우 신라보다는 백제 쪽으로 문화나 경제적, 군사적 의존도가 기울어지는 경향이 드러나는 걸 보면 서로 상반되는 경향이 드러나는데, '''백제 입장에서 이는 그간 꾸준히 공을 들여왔던 영산강 유역 세력이 대가야보다도 백제에게 비협조적이 되었다는 걸 뜻했다.''' 그러나 정작 백제에게 더 큰 타격은 그간 침미다례는 물론이요 건마국 일대 세력보다도 경제군사적으로 약했던 전라도 동부 [[섬진강]] 유역 일대에게서 발생하게 된다. 이 전라도 동부는 그 시대 기술로는 평지가 적고 물살도 좁고 빨라 큰 공동체가 발생하기 어려운 환경이었으며, 때문에 영산강 유역과는 달리 공동체들이 죄다 따로 노는 분위기였다. 그래서였는지 한성백제는 마한 신미국이란 명칭으로 대외에 자칭하면서[* '진서(晋書) 卷36 列傳 동이마한신미제국(東夷馬韓新彌諸國)' 즉 여기서 신미(新彌)가 침미다례(忱彌多禮)이다.] 백제국의 마한 대표 자격에 이의를 제기하던 영산강 유역 세력에게만 신경을 썼는데, 그러나 4세기 초에 가야가 섬진강 유역과 활발한 교역을 추진하면서 영향력을 심어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이 전라도 동부의 경제군사적 실력은 서서히 상승하고 있었고, 한성백제가 한성을 공함당하자 대가야 연합에 참여하면서 아예 백제가 주도하는 마한 연합에서 이탈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현재 전북 동부인 [[남원시]], [[장수군]], [[구례군]]이나 [[순천시]], [[여수시]] 같은 섬진강 유역 에는 가야 계통 유물과 고분들이 나타나는 게 바로 이것이 원인이었다.[* 고대 국가 형성기에 철기문화의 모태 지역으로 철기 유적이 밀집된 현재의 전북 지역은 마한과 가야 문화의 공존과 융화된 모습이 나타나는 지역으로 이로부터 가야의 국력이 확장하는 계기가 된 지역으로[[https://www.yna.co.kr/view/AKR20190523111600055|#]] 이들 지자체에서도 가야사 연구를 지원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금동관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왕과 신하와 같은 수직적 관계에서는 칼이 하사품으로 등장하지 금동관이 등장하지는 않는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칼이 주로 하사품으로 등장하는 지역은 해당 공동체의 수장이 극히 미약해서 금동관까지 줄 필요가 없었거나, 아니면 아예 해당 지역을 백제 중앙 지역에서 파견한 군사령관이 힘으로 지배하는 직접 지배 지역에서 나타나는 양상이기에, 칼이 아니라 금동관이 등장한다고 지배 지역이 아니라곤 할 수가 없다. 금동관은 독립된 세력의 최고 지배자를 뜻하는 것으로 금동관을 하사하였다면 이는 곧 공존과 협력을 의미하지만, 그것이 백제와의 상하 관계를 꼭 뜻하지 않는다곤 해석할 수 없다. 이런 해석으로는 백제가 아예 천도까지 감행하기 직전 공주 수촌리 세력이 한성백제 시절에도 금동관을 사여받은 사실, 그리고 백제국이 마한의 원수장국이었던 익산 건마국을 해체하기 위해 준왕 계열의 잔여 세력인 입점리, 웅포리 세력들에게 금동관을 사여한 사실이 잘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아무래도 한성 공함 직후 백제가 정신을 추스르기 전 시기에 영산강 유역에서 쓴 금동관은 당시 백제에게서 사여받았다고 보기엔 너무나도 화려할 수 있고 독자성도 강하기에, 적어도 영산강 유역 세력을 우대해줬거나 반(半)독립적 지역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다. 다만 이렇게 서남부는 자치체가 상당기간 존재했고, 동부는 대가야 연합으로 이탈하는 일이 일어났어도, 개로왕 때까지 진행된 백제의 남진이 헛되지는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로 다른 전라도 세력들보다는 백제에게 협조할 이유가 많았던 옛 건마국 세력의 전북 서부, 그리고 영 제어가 버거운 영산강 유역을 상대하기 위해 백제가 직접 키운 광주 세력을 위시한 전남 내륙부 일대는 여전히 백제 왕실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백제는 이 일대 세력들을 지렛대로 삼아 영산강 유역 세력은 회유와 타협을 통해 5세기 후반~6세기 초반 경에 복속을 완료하게 되는데, 문제는 그전 [[한성백제]] 시절엔 백제에게 딱히 반항한 바 없는 가야 세력이었다. 이들은 대가야의 지원에 힘입어 영산강 유역 세력과는 달리 '''무력으로 백제에게 격렬하게 저항'''했으며, 적어도 한 번은 대가야와 함께 백제의 공격을 격퇴해냈지만 이때도 여수, 광양, 순천 일대는 백제가 사수해냈고, 끝내 520년대 중반부터는 백제에게 무력으로 복속당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무령왕 재위기인 520년대부터 전라도는 한 나라 안에서 처음으로 전체가 직접 지배세력화되게 되는데, 이것이 경상도-신라에 대응하여 전라도에 백제 계승의식이 자리잡히게 되는 이유가 된다. 전라도 일대는 이 상태로 660년 백제가 망하기 전까지 적어도 수백년 동안은 백제의 직접 지배 체제 아래에서 통합되었기 때문이다.[* 단 전라도 무주 일대는 6세기 후반에 관산성 전투 후 진흥왕의 신라에게 빼앗긴 후 백제가 망할 때까지도 되찾지 못했고, 남원, 진안, 장수 일대는 역시 6세기 후반 진흥왕의 신라에게 빼앗긴 후 616년에야 백제의 무왕이 수복했으니 여기서 예외지만, 일부 지역 및 시대적 예외에 불과하기에 각주로 남김] 다만 이 또한 아무래도 후세인의 통설적 설명에 불과한 것은 사실. 이 시기에 백제는 영산강 유역 세력, 건마국 일대의 옛 준왕계 세력에게 베풀었던 호의적인 조치와는 달리, '''유독 전라도 동부 일대의 현지인 유력자들에겐 현령 자리도 주지 않으면서 소단위 지배 단위까지 죄다 외부에서 파견해 채우는 꽤나 신경질적인 조치를 단행'''하게 된다. 이는 다름아닌 통일신라가, 백제 멸망 직후 옛 백제 지역 전체에게 단행한 조치와 비슷하였다. 적어도 6세기 중반 시점에선 백제에 대한 호감도와 친밀감이, 전라도 각 지역마다 제각기 달랐을 개연성은 부정할 수 없다. 일단 이렇게 백제는 [[6세기]]에 지역 체계로 22담로를 갖추고 있었는데, 6세기 중반에 가서야 완전히 전라도를 지배지로 편제한 후 백제의 지역 체계가 37군으로 개편된 것으로 보아 옛 마한 거수국들 당시 형성된 자연 경계들이 백제라는 이름 아래 체계만 달리하여 계속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수도권의 마한 17국은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빼앗은 지역으로 추정되는데, 이후 고구려가 이 지역으로 16개 행정구역을 편성한 것을 보면 이는 마한 54국 중에서 수도권 마한 17국 정도와 거의 일치한다. 즉 현재 지역 기준으로 수도권 마한 17국, 충청도 마한 12국, 전라북도 마한 10국, 광주와 전남의 마한 15국으로 추정되는데 도합 마한 54국으로 이중에서 수도권 17국을 뺀 37국과 백제 멸망 무렵의 지역 체계가 일치한다. 다시 말해 백제 복속 전에 이 지방에 있던 세력이 그대로 백제의 행정구역으로 편제된 것이다. 백제가 직접 지배를 완료한 시점에서도 옛 마한 거수국들 시절의 문화적, 경제적 경계를 무시할 수 없었음이 여기서 드러난다. [[538년]]에 [[성왕(백제)|성왕]]은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으로 천도하였으며 부여 바로 아래에 있는 전북은 이때부터 차차 백제의 중심지가 되기 시작하였다. [[무왕]] 대에 가면 지금의 [[익산]]으로 천도하려 했는데, [[왕궁리 유적]]이 당시 천도하려고 짓던 도시가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