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북대학교/역사 (문단 편집) == 성장기 == [[한국전쟁]]의 발발로 혼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각종 어려움과 인고의 시간을 겪은 후, 1951년 10월 7일, 비로소 국립전북대학교가 설치인가를 받았다. 개교기념식은 1952년 6월 8일에 이뤄졌으며, 설립 당시 5개 단과대학, 16개 학과, 학생정원 2700명으로 출범하였다. 국가가 인가를 내고, 국비로 토지를 제공받고, 건물을 짓고 하기에는 시간과 여력이 충분하지 못하였기에 기존에 있던 명륜대학, 이리농과대학, 군산 상학관을 통합하여 개교하게 되었다. 개교 초기,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정부의 지원은 불가능해졌고, 교지 마련과 운영은 오롯이 학교의 몫이었다. 그러던 중 익산의 유지인 전용진 선생이 '일본을 이기는 길이 후대의 교육에 있다'고 생각하여 전북대 농대에 자신의 땅을 기부하였다. 지역 주민들도 학교 부지마련을 지원했다. 당시 구 대한제국황실 재단이 현 덕진 캠퍼스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고, 황실 재단이 기부채납 형식[* 출처: 전북대학교 개교 70주년 교지]으로 70여만평의 땅을 제공하였으며, 당시 기준으로 4백여만원을 대가로 지불하였다. 이 기금의 출처는 당시 전북대학교 후원재단에서 주민들의 기금을 모은 것이었다.[* 출처: 배움, 그 위대한 유산, 전주MBC] --그래서 가끔 전북대는 황립대학이라며 자랑하기도 한다. 서거석 총장님이 연설때 황립대학이라고 자랑한건 안비밀-- [[덕진동(전주)|덕진동]]에 부지가 확보된 다음, 익산과 군산의 대학을 이전하는 대에는 많은 진통이 있었으며, 특시 익산에 위치한 농대와 공대를 이전하는 과정은 첩보작전을 방불케 했다. 이는 지역주민들의 반대가 극심했기 때문인데, 농대의 경우 [[35사단]](!!)을 동원하여 학교를 이전했다고 한다. 공대의 경우 더 심각했는데, 농대 이전으로 흉흉해진 이리(익산)의 민심에 불을 붙였기 때문이다. 학생들과 교수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렸으며, 급기야 1968년 발생한 시위에서는 7백여명의 시민과 학생이 참가해 경찰과 마찰을 빚었다. 이러한 시위는 학교 주변에 위치해있던 상가 번영회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공대와 농대는 성공적(?)으로 덕진캠퍼스로 이전할 수 있었고, 지금에 이르렀다. 다만 구 이리농과대학에 설립되었던 익산전문대학이 전북대학교에 통합됨에 따라 환경생명자원대학과 수의대학이 해당 자리로 이전한 것은 굉장히 상징적이라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