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전예 (문단 편집) == [[삼국지(정사)|정사]] == 초기에는 여러 세력을 전전하는, 다사다난한 생활을 보냈다. 본디 젊었을 적에는 '''공손찬에게 의탁한 [[유비]]의 수하였다.'''[* 고당현령으로 있다가 도적에게 격파되어 임지를 버리고 공손찬에게 유비가 의탁한 것이 191년 이전의 일로 보이고 전예가 위나라 가평 연간에 82세로 세상을 떠났으니 이때 전예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나이였다.] 전예전에 따르면 전예가 '''스스로''' 의탁하여 섬겼다고 하니 당시 유비의 상황이 상당히 불안정했음을 감안하면 그에게 상당히 매료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유비가 그를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고 한다. 주군과 부하가 까놓고 말해 아무것도 아니던 시절 주종관계를 맺었는데 부득이하게 헤어지고 나서야 둘다 대성한, 흠많무한 케이스다.[* 유비는 이후, 진군, 진등, 서서 등 유능한 인재들을 놓친 적이 있지만 그 시절에 그는 최소 주자사 정도는 맡던 시절이니 아무것도 없는 수준의 세력은 아니였다.] 이후 유비가 [[도겸(삼국지)|도겸]]에 의해 예주자사가 된 194년 무렵에 고향의 노모를 모시기 위해 유비와 헤어졌는데 이때 유비가 눈물을 흘리며 그와 작별하면서 "그대와 더불어 함께 대사(大事)를 이루지 못함이 한스럽구려."라고 말하면서 무척 아쉬워했다.[* 그나마 전예는 이후로 북방이나 대오전선 쪽에서 주로 근무한지라 유비 및 그가 세운 나라인 촉한과 직접적으로 싸우진 않았다. 이에 대해선 상술한 유비군 복무기록 탓에 일부러 대촉한 전선 쪽으론 배치를 안 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공손찬을 섬겼으며, 공손찬 휘하에서 천주현[* 동주현이라고 하는데 이런 행정구역은 실제로 없었다. 그래서 유주 어양군 천주현의 오기로 보인다.]을 지켰는데, 공손찬의 수하였다가 [[원소(삼국지)|원소]]에게 투항한 장수 [[왕문]]이 군사 만여 명으로 공격하자 전예가 말했다. >그대는 공손씨의 은혜를 입고도 떠났지만 부득이한 사정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했었소. 그러나 다시 돌아와 이처럼 공격하는 것을 보니 그대가 한낱 배신자에 지나지 않음을 이제야 알게되었소. 대저 보잘것 없는 지혜를 가진 자라도 자기 것을 지키며 쉽게 내어주지 않는 법이거늘, 하물며 나는 이곳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소. 어찌 속히 공격하지 않는 것이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왕문은 부끄러워해 돌아갔으며, 이 일로 공손찬은 전예에게 권모가 있음을 알았지만 중용하지 않았다. 성급하게 원소와 싸우려는 공손찬을 말렸지만 무시당했다가 결국 공손찬이 멸망하자 [[선우보]]의 밑에서 장사를 지냈는데, 선우보가 누굴 따르는 것이 좋은지 묻자 필경 조조가 이길 것이라 해 조조를 따르도록 했다. 208년에 [[조조]]가 승상이 되자 부름을 받아 승상공모연으로 임명되었다가 낭릉 현령과 익양태수 자리에 있을 때 가는 곳마다 공이 있었으며, 218년에 [[조창]]이 이민족을 토벌하러 갈 때 대군(代郡)을 치며 전예를 상(相)으로 삼았다. 군대가 역수(易水) 북쪽에 주둔하자 이민족이 기병을 복병으로 두었다가 공격하니 군인들이 요란해져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전예가 지형에 의거하여 수레로 둘러싸 원진[* 헝가리의 wagon 전법이나 [[팔진도]], [[국의]]가 공손찬의 백마의종을 막을 때의 전법과 비슷하다.]을 만들면서 그 안에서 군사들이 [[활]]과 [[쇠뇌]]를 가득 당기고 의병(疑兵)들을 그 틈에 채워두었다. 이민족들이 진격하지 못하고 흩어져 물러나자 이를 뒤쫓으며 대승을 거두었고 마침내 대를 평정했다. 조창을 도와 대를 토벌한 것은 모두 전예의 계책 덕분이었다. 이후 남양태수로 승진하는데 남양태수로 지낼 때 [[후음]]이 반란을 일으키자 완을 점령해 그로 인해 수많은 도적 떼들이 생겨나 민심이 흉흉했는데, 전 태수가 그 중 500명을 붙잡고 전예에게 자랑하면서 "병사들의 사기와 저런 놈들이 다시는 없도록 본보기를 위하여 몽땅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오히려 전예는 그들을 좋은 말로 타이르고 그대로 풀어줘 그 소문이 널리 퍼져서 후음의 군단이 해산하고 도둑들이 싹 사라졌다. 220년에 [[조비]]가 즉위하자 오환교위 지절이 되어 오환족을 감독하는 역을 맡았으며, 그는 이이제이의 전법을 기본으로 삼아 그들을 상대해 소리가 말 천필을 중국에 관에 보낸 일로 [[가비능]]에게 공격을 받자 전예는 그를 도와주러 갔다가 너무 깊숙한 곳으로 가 귀로가 끊기게 된다. 이에 전예는 소똥과 말똥을 태워 불을 환하게 유지해 군사가 있는 것으로 위장해서 빠져나왔으며, 적이 뒤쫓아 다시 마성에서 포위되자 [[성동격서|남문으로 큰소리를 내어 나가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북문으로 나가 적을 공격]]해 예상치 못한 상대의 군대를 대파한다.[* [[견초]]전에는 견초의 공으로 되어있다.] 오환왕 [[골진]]이 오만방자하게 굴자 전예는 백여기 만을 이끌고 골진의 진영으로 가서 그의 목을 베고 빠져나오자 모두 두려워해 감히 행동하지 못하고 골진의 동생에게 골진을 대신하게 했을 뿐이며, 이후로 전예의 위엄에 호인들은 감히 대항하지 못하게 되었다. 산적 고애가 노략질을 하자 선비족의 소리를 보내 고애를 배게 했으며, 이 공으로 전예는 장락전후에 봉해졌다. [[공손연]]이 배반할 때 조정이 오나라와 [[공손연]]의 연계를 두려워 해 [[양기(삼국지)|양기]]의 추천으로 전예에게 일을 맡기자 산동반도에서 진을 치고 기다렸는데, 텅 빈 땅에 진을 치고 있으니 사람들이 다들 미쳤다고 여겼으나 갑자기 폭풍우가 일어나 [[주하]] 등 공손연에게 갔다가 돌아오는 오나라 사절이 산동반도에 표류하자 몽땅 다 잡아들인다.[* 오가 공손연에 파견한 사신인 [[장미(삼국지)|장미]], [[허안]] 등은 오와 친교를 유지할 생각도 없고 재물에 욕심을 낸 공손연에게 처형당했고, 주하가 그나마 살아남아서 배를 타고 오로 귀환하려 하던 차에 이런 봉변을 당한 것이다.] 234년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 때 [[손권]]이 10만 대군을 칭하며 촉과 함께 양동 작전으로 신성을 공격하니 [[만총]]이 곧장 신성을 구원하려 하자 전예는 >적이 모든 부대로 대거 출군한 것은 단지 작은 이익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신성을 담보로 하여 우리의 대군을 끌어들이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공성하도록 내버려두어 그 예기를 꺾어야 마땅하고 그들과 더불어 적극적으로 싸워서는 안 됩니다. 성이 함락되지 않아 적군은 필시 피로하고 나태해질 것이니 파태해진 연후에 적을 공격하면 크게 이길 수 있습니다. 라고 조예에게 진언한다. 당시의 상황에 비춰 적의 의도를 파악해 구태여 급하게 병력을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이길 수 있는 방책을 제시한 것인데, 이 자체만으로 이미 상당한 식견을 드러낸 것이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층 더 나아가 >만약 적이 우리의 그런 계책을 알아챈다면 필시 공성하지 않고 '''형세상 스스로 달아날 것입니다.''' 만약 곧바로 진병하면 적의 계책에 그대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또한 대군이 서로 상대할 때는 응당 알기 어렵도록 해야하며 자획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라고 아예 손권의 전략과 행보를 완전히 예측한 듯한 의견을 피력하였고 조예가 이를 따르니 과연 그 말대로 손권은 도주하였다. 경초 연간(237 ~ 239년)에 식읍이 3백 호가 늘어나 5백 호가 되었으며, 232년에는 진이장군을 지내 겨울 10월에 군대를 이끌고 오나라 대장 [[주하]]를 성산에서 토벌하고 죽였지만 [[정희]]의 참언 때문에 공적이 거론되지 않았다. 정시(240 ~ 248년)에는 사지절, 호흉노중랑장, 진위장군, 병주자사로 임명되었으며, 이에 호인들은 예전에 그의 위명을 따라 서로 뒤따르며 헌상했고 후에 위위가 되었다가 여러 번 사직을 청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마의]]가 이를 들어주지 않았으며, 결국 병이 위독하다고 해 태중태부의 벼슬에 임명되었다가 252년에 향년 82세로 죽었다. 청렴해서 포상은 언제나 장사들에게 흩어주면서 호와 적이 보낸 사사로운 선물은 모두 장부에 적고 관에 보관할 뿐 자기 집에 들이지 않아 집안이 늘 가난했다. 비록 그와 다른 부류의 사람일지라도 모두 전예의 절의를 높게 여겼을 정도였다. 그의 청렴함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선비족 소리 등이 바친 소와 말은 언제나 관으로 보냈는데, 전예가 가난한 것을 불쌍하게 여긴 호가 금 30근을 바치면서 집안의 재산으로 삼으라고 하자 소매를 펼쳐 받았다가 돌려보낸 뒤에 관에 바치니 조정에서는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칭찬한다. >옛날에 위강[* 춘추시대의 인물. 진도공의 신하로, 융족의 화친을 거부하려는 임금에게 간언해 화친을 받아들이게 했다.]은 가슴을 열어 융의 뇌물을 받았는데 이제 경은 소매를 들어 적의 금을 받았으니 짐은 이를 매우 가상히 여기노라. 그리고는 비단 5백 필을 하사했다. 전예는 하사품을 받자 이를 나누어 그 중의 절반은 소부에 간직하고, 뒤에 호가 다시 왔을 때 나머지 절반은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또 여남에서 그가 쇠약해졌다는 말을 듣고 비단 수천 필을 모아 전예에게 줬지만 받지 않은 일도 있었다. 전예가 죽으면서 말하길 [[서문표]]와 같은 길을 걸었으니 그와 같은 곳에 있을 수 있을 것이라면서 서문표의 사당 옆에 묻을 것을 분부했다. 아들 전팽조(田彭祖)가 후사를 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