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인회 (문단 편집) == 생애 == 전인회의 조부 전궤(田軌)는 수나라에서 유주(幽州) 자사를 지냈고 신도군공(信都郡公)에 봉해졌으며, 부친인 전홍(田弘)은 능주(陵州) 자사를 지냈고 신도군공을 습봉하였다. 전인회는 무덕(武德) 연간에 제거에 응시하여 좌위병조(左衛兵曹)로 제수되고 좌무후중랑장(左武候中郞將)을 역임하였다. 644년, [[태종(당)|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이떄 [[설연타]]의 기병들이 하남(河南)을 침공하자, 전인회는 [[집실사력]]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이를 격파하여 북쪽까지 쫓아냈다. 전후 태종은 전인회의 공을 칭찬하였다. 651년, 평주(平州) 자사로 제수되어 학문을 권하고 농업에 힘써서 선정을 펼쳤다고 칭송받았으며, 임기를 마친 뒤 영주(郢州) 자사로 전임되었다. 전인회가 영주로 부임했을 당시 영주에는 가뭄이 들었는데 전인회는 직접 기도를 올려서 마침내 단비가 내리게 되었다. 그해에 영주는 풍년이 들어서 영주의 백성들은 전인회의 치적을 칭송하였다. >부모가 우리를 기른 것처럼 전 사군의 정성은 사람과 하늘이 알고 있다. 밭에는 비가 내리고 산에는 구름이 떠다니며, 곳집은 이미 충실하고 예의가 드러났다. 단지 항상 가난에 시달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후 전인회는 등주(勝州) 도독으로 전임되었다. 당시 등주 경계에는 산적이 험준한 지형을 장악하며 약탈을 일삼고 있었는데, 전인회는 기병을 이끌고 이들을 붙잡아 참수하였다. 이때부터 등주에서는 바깥문을 닫지 않았고 도적들이 자취를 감췄다.[* 바깥문을 닫지 않는다는 것은 천하가 태평하여 도둑이 없으므로 문을 잠글 필요가 없을만큼 질서가 양호하다는 뜻이다.] 이후 입조하여 태부소경(太府少卿)이 되었다. 665년, 우금오장군(右金吾將軍)으로 전임되었다. 전인회는 자신이 받은 녹봉을 추산하여 여유가 있다면 여분의 녹봉을 관고에 넣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전인회가 좋은 명예를 구한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전인회는 나쁜 짓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어서 밤낮으로 장안의 순찰을 돌며 법을 어기는 행위는 즉시 단속했다. 전인회는 매일 법을 어긴 수많은 이들에 대해 직접 벌을 집행하며 무관용의 원칙을 고수했기 때문에 장안에서는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전인회를 두려워했다. 당시 채씨(蔡氏)라는 여성 무당이 귀도(鬼道)를 통해 자신은 죽은 자를 되살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전인회는 채씨의 주장을 거짓이라고 판단해서 [[고종(당)|고종]]에게 채씨를 장안에서 쫓아내고 변경으로 보내야 한다고 주청하였다. 이때 고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죽은 사람이 살아나지 못했다면 이것은 곧 요망한 것이요, 만약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면 이것은 죄과이다. 결국 전인회의 주장에 따라 채씨를 변경으로 쫓아냈다. 669년, 태상정경(太常正卿)으로 임명되었다. 함형(咸亨) 연간, 전인회는 우위장군(右衛將軍)으로 전임되었다가 연로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후 679년에 죽어서 위(威)라는 시호를 받았다.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시안시 출신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