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진(오호십육국시대) (문단 편집) === 혼란과 쇠퇴 === 그 뒤 농서의 [[걸복국인]](乞伏國仁)이 일으킨 반란을 시작으로 '''비수전역 패배 직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전진은 멸망의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진다.'''[* 사실 이 반란의 원인은 부견 그 자신의 정책에 있었다. 이상주의자였던 부견은 멸망시킨 나라의 국민들을 수도로 이주시키고 오히려 저족을 지방으로 내보냈는데, 전진이 비수대전에서 지자 이 정책은 전진을 발목잡는 원인이 되었다.] 이로써 오호십육국시대가 계속 연장되고, [[남북조시대]]의 개막은 50여 년 후로 미뤄지게 된다. 부견은 모용홍, 모용충의 [[서연(오호십육국시대)|서연]]에게 공격을 받아 장안을 버리고 도주하였다가 [[강족]] 출신 [[후진(오호십육국시대)|후진]](後秦)의 [[요장]](姚萇)에게 사로잡혀 [[선양]] 요구를 거부하고 그를 모욕하다가 죽음을 당했다.[* 부견은 이민족이던 요장과 모용수 등을 중용하고 우대했으며 진심으로 포용했다. 그러나 요장은 그가 불리한 틈을 타서 그를 사로잡아 죽이고 말았다. 나중에 [[동진]]의 권신 [[유유(송무제)|유유]]가 요장의 손자 요홍을 수도 건강으로 압송해 요씨 일족들과 함께 참수시켜 후진은 멸망했는데 일종의 [[인과응보]], [[업보]]였다. 반면 모용수는 일종의 애증관계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서인지 그가 세운 [[후연]]은 상대적으로 번성했다.] 그 뒤 부견의 서장자인 부비(苻丕)가 385년 8월 말 진양에서 황제에 올랐다. 부비는 피폐한 세력을 이끌고 전진을 부흥시키려 하지만 끝내 상황이 나빠져 진양에서 출진하여 [[평양]](平陽)으로 진출한다. 하지만 거기서 모용영(慕容永)의 습격을 받아 대패하고, 동진의 낙양을 무모하게 습격하였다가 전사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