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폐 (문단 편집) == 상세 == '팔방통화(八方通貨)', '팔방통보(八方通寶)' 또는 '유엽전(柳葉錢)'이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 이전까지는 화폐가 사용되지 않았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문헌 기록상으로 자모전, 무문전, 금, 은전 등이 언급되기는 하나 일단 이를 입증할 유물이 전혀 없으며, 문헌에 언급되더라도 본격적인 화폐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쌀이나 포목 등을 곡화(穀貨), 미화(米貨), 포화(布貨)라 부르며 [[물물교환]]하다가 가끔 한두번씩 사용된 정도로만 확인되고 있다. 다만 예외적으로 [[덩이쇠]]같은 경우는 매우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다 고려시대에는 건원중보, 은병, 해동통보, 쇄은 등이 나오지만 역시 당시 미포(米布)라 불리던 쌀과 삼베포를 주로 이용하고 화폐는 귀족 등의 상위층이 특수한 경우에만 사용했으며, 그마저도 고려 후기에 가면 [[양심]] 없는 인간들이 당시 화폐로 사용되던 은에 동을 섞는 경향이 나타나면서 거래할 때마다 일일이 순도를 검사하고 중량을 달아봐야 하게 되면서 모두 화폐로서의 기능을 상실해 버렸다. 조선이 들어선 후 초기엔 고려시대의 해동통보, 은병, 쇄은을 사용하다 앞과 같은 문제로 모두 사용을 금지하고 [[태종(조선)|태종]] 2년에 저화라는 것을 만들었다. 최초의 지폐, 즉 종이돈으로 [[닥나무]] 껍질을 엮어 종이를 만든 후 도장을 찍고 품질과 길이를 규격화하여 만든 것으로 [[성종(조선)|성종]] 때까지 약 100여년간 유통된다. 그러나 조정에서 현물을 받고 저화를 주었으나 정작 조정 측에서는 현물로 저화를 태환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저화의 가치는 폭락하였고, 저화로 받기로 규정했던 세금들은 실제로는 쌀로 받는 등 조정 측에서도 저화의 유통 정책에 이중잣대를 적용하여 신뢰를 잃었다. 때문에 [[세종대왕]]이 동전인 조선통보를 발행하여 저화를 고액거래, 조선통보를 소액거래에 사용토록 하게 하였으나, 조선통보는 유통에 실패했다. 이때 세조는 대군시절 아버지인 세종대왕 곁에서 화폐개혁이나 기타 여러가지 일들을 돕고 있었는데 훗날 본인이 왕위에 오른 후 아버지의 뜻을 잇겠다며 만들게 한 것이 바로 이 전폐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