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폐제(유송) (문단 편집) === 근친 겁탈 패륜 === 유자업에게는 아내 하영완(何令婉)이 있었다. 그 아버지는 하우(何瑀)였으며 어머니는 무제 [[유유(송무제)|유유]]의 딸 예장공주 유흔남(劉欣男)이었다. 유자업 본인이 유유의 증손자이므로, 유유의 딸의 딸인 외손녀와 혼인했다는 것은 5촌 당고모하고 혼인한 것이다. 예장공주는 원래 서교와 결혼했다가 서교가 [[요절]]하자 하우와 재혼했으며 하매와 하씨를 낳았다. 그리고 하매의 아내가 유의륭의 친딸인 신채공주[* 사실 이쪽도 근친혼이다. 하매는 유유의 외손자, 신채공주는 유유의 친손녀다. 사촌오빠랑 혼인하였다.]인데, 유자업에 의해 처남이자 당숙인 하매는 살해당하고, 당숙모이자 친고모인 신채공주는 유자업의 첩이 되었다. 그런데 하영완은 대명 5년(461년)에 죽어서 남편이 황제가 된 후 헌황후로 추존되었다. 따라서 유자업은 즉위 당시 본처가 없었다. 황후가 없는 황제 유자업은 아버지보다 도를 넘어선 황음무도한 생활을 했는데, 송문제 유의륭의 10녀이자 효무제 유준의 친동생인 '''친고모''' 신채공주[* 新蔡公主, 유영미(劉英媚)]를 '''[[겁탈]]'''하고, 궁중의 한 여종을 살해해서 신채공주가 죽었다는 소문을 내며 장사까지 치렀다. 물론 진짜 신채공주는 귀빈으로 삼아 성을 사씨(謝氏)로 고쳤으며, 덤으로 후환을 방지하기 위해 고모부 겸 당숙부 겸 前처남 하매(何邁)는 죽였다. 그리고 신채공주가 그 후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게다가 일찍이 '''친누나 [[산음공주]](山陰公主)도 근친상간을''' 했다. 어느 날 '''"폐하는 육궁에 후궁이 많으면서 신은 겨우 부마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는 매우 불공평합니다."'''라는 식으로 산음공주가 불만을 품자, 유자업은 산음공주에게 '''면수, 즉 아름다운 남첩 30명'''을 선물했다. 산음공주는 남편 하집이 미남이었고 남첩 30명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만족하지 못했다. 산음공주는 의원을 유혹해 음욕을 채우고 거기에 당대의 미남이었던 이부랑 저연(褚淵)을 유혹했다. 문제는 저연은 남군공주의 부마였는데, 이 남군공주는 산음공주의 고모였다. 즉, '''저연은 산음공주의 고모부였다.''' 차마 고모부를 대놓고 유혹하긴 그랬는지 그녀는 조서를 내려 저연이 무조건 자신에 집에 오도록 했다. 산음공주는 저연이 오자 끊임없이 유혹하고 온갖 추태와 교태를 다 부렸지만 저연은 당대의 인재답게 유혹을 거부했고 결국 포기했다. 저연이 고결한 인물이라는 평도 있지만, 저연도 나중에 [[소도성]]이 찬탈할 때에 그에게 붙어서 온갖 추태를 부렸다. 이런 음란한 산음공주는 전폐제가 죽은 후에 바로 처형됐는데 남첩 30명도 같이 순장되었다. 당시 산음공주의 나이는 만 19세에 불과했다(446-465). 산음공주의 외동딸이 바로 [[제나라]] 울림왕 [[소소업]]의 음란한 황후 하정영이었다. 하정영이 산음공주가 아니라 하집의 첩 송씨의 소생이라는 설도 있지만 공식적인 기록에는 산음공주의 소생이었다. 유자업은 거기다가 유휴인의 어머니이자 할아버지의 후궁이었던 양씨(제3대 문제 [[유의륭]]의 후궁으로 수의라는 후궁 직급을 받았다.)에게 온갖 음란한 짓을 하도록 강요했다. 즉 의붓할머니인 어른을 강간교사한 것. 그리고 좌우 심복들에게 양씨를 범하도록 했는데, 이때 그들 중에서 유도륭이 환심을 얻으려고 온갖 추악한 짓을 하며 양씨를 [[강간]]했다. 거기에 유휴인의 아내 은씨는 병이 들어 진찰하려고 미남 의원 조번이 오자 병 치료는 제쳐두고 조번과 간음했다. 하지만 이게 누설되자 조번은 죽임을 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