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학공투회의 (문단 편집) == [[미시마 유키오]]와의 대담 == [[파일:external/www.chosun.com/200603310896_01.jpg]] [[전공투]]는 도쿄대학 점거 와중에 [[미시마 유키오]]를 초청해 일대 논전을 벌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1969년 5월 13일 1천여 명의 [[전공투]] 학생들이 모인 [[도쿄대학]] 교양학부 900번 강의실에서 전공투 측 패널들과 [[미시마 유키오]]는 2시간 반 가량 대담을 가졌다. 미시마 유키오가 몇 백 명의 전공투 학생들을 상대로 혼자 설전을 펼쳤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고 실제로 대담에 참여한 것은 전공투 측의 패널 3-4명과 청중 중에서 발언한 몇 명 정도이며 대담집에 실린 전공투 측 발언자는 도합 8명이다. 이 대담의 의의를 확대해석하면 안 되는 것이, 위계나 고정된 조직이 없다는 전공투의 특징 상 이 대담도 논-섹트, 즉 아무 분파에도 속하지 않은 몇 명의 학생들이 거의 즉흥적으로 아이디어를 내 미시마 유키오를 섭외하고 입소문으로 청중을 모은 것이기 때문에 이 대담에서 패널로 나온 학생들이 어느 정도까지 전공투의 사상을 대표하는지는 비판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안 그래도 사상 분열과 내부 투쟁으로 계파가 천 갈래 만 갈래였던 전공투이다 보니... [[극우]]와 [[극좌]]가 만난 거라 분위기가 험악했다고 짐작할 수 있지만 미시마 본인도 [[도쿄대학#학부|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한 선배이기도 하고 서로가 일본의 현체재를 부정한다는 데에 견해를 같이 하면서 묘한 공감대를 보이면서 대체로 유쾌하고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미시마 본인도 이 대담이 매우 즐거웠다고 대담 후기에서 언급하고 있고 자신이 만든 극우 조직인 [[다테노카이]]의 측근에게 "동경대생들이 머리가 좋더라"고 회상했다고 한다. 양쪽은 자아와 육체, 시간과 공간, [[천황]]의 역사적 존재에 이르기까지 [[철학]]과 [[역사]]를 두루 포괄하는 등 진지한 논쟁을 벌였다. 일단 양쪽 모두 기성 체제에 대한 염증과 [[분노]]를 공유하고 있었고 기존 체제를 타도하기 위한 폭력의 불가피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토론 내내 각자의 가치를 역설하고 서로를 논파하는데 주력한다. 이 과정에서 상호 간에 회유내지는 야유의 의미가 담긴 말이 많이 오고 갔다. 예컨대 [[미시마 유키오]]가 "당신들 속에 있는 절대적인 것에 [[천황]]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되잖아?"라고 운을 띄우자 이에 전공투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바리케이드]] 속으로 들어오면 되잖아?"라고 받아쳤다. 사실 미시마 유키오와 도쿄대 전공투 사이의 가장 큰 갭은 천황제가 아니라 [[국제주의]]였다. 당시 절대적인 실존적 행동을 믿는 방식은 미시마 유키오나 전공투 구성원들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미시마는 [[우익]]답게 "민족적 자존을 잃어서는 안되고 외세의 영향력은 믿을 게 못 된다"는 입장이었고 전공투는 국제사회의 혁명적 연대를 믿었다. 결국 [[미시마 유키오]]는 "나는 제군의 열정을 믿습니다"라고 나름 덕담(?)을 건내면서도 결국 "지금 제안은 아주 묘한 꼬드김이라 아주 유혹적이지만, 나는 공투(공동투쟁)을 거부합니다."라는 말로 토론을 마무리한다. 이 대담은 [[TBS 테레비]]에서 현장을 녹화, 방영했고 책으로도 출판되었다. 현재에도 당시 영상은 남아 있지만 TBS의 저작권 침해 신고로 유튜브에서는 찾기 어렵다. [[https://youtu.be/IWFLRU2PQwM|#]]전공투의 증언으로는 대담집 출판은 미시마가 혼자 결정하고 진행한 일이라고 한다. 이 대담집은 한국에서 <미시마 유키오 對 도쿄대 전공투 1969-2000>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이 책은 사실 두 권의 책을 합한 것으로, 1969년의 대담집과 1999년에 당시 전공투 측 패널이었던 인물들이 30년만에 다시 모여 이틀간 진행한 토론을 책으로 엮은 것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다소 현학적인 내용이지만 전공투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일독을 추천한다. 1969년의 대담을 읽으면서 유념할 부분은 당시 전공투 운동을 둘러싼 시대상이나 그들의 정신 세계를 이해하는 것을 돕는 [[르포르타주]]로서의 의의는 있지만 사상적 가치는 그리 높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 대담이 읽기 난해한 이유 중 하나가 여기 참여한 전공투 측 패널들이 20대 초반의, 말하자면 "이데올로기 오타쿠"들이다 보니 이들이 하는 말이 상당히 "오타쿠"스럽다. 예컨대 [[디시인사이드]] [[구 정사갤]]이나 [[야갤]]에 올라오는 밈으로 도배된 글들을 일반인들이 알아먹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다. 자기들끼리만, 또는 자기 혼자만 아는 개념이나 용어로 말을 할 때도 다들 그러려니 넘어가다 보니 가만 보면 심지어 미시마 유키오도 못 알아듣고 문맥을 놓치는 부분들이 있다. 대화의 지적 수준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난해함을 심오함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이 대담이 이루어지고 1년 후 1970년 11월 25일 미시마는 [[자위대]] 본부를 점거하고 [[할복]]으로 자살하는 [[미시마 사건]]을 일으켰다. 일각에서는 이 대담에서 이미 미시마의 자결이 예견됐다고 본다. 다음은 미시마가 토론 도중에 했던 발언이다. >내가 행동을 벌일 때는 결국 제군과 똑같이 비합법적으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비합법적으로, 결투의 사상으로 사람을 죽이면 살인범이니까, 경찰들한테 잡혀가기 전에 자결이든 뭐든지 해서 죽어버릴겁니다. <미시마 유키오 對 도쿄대 전공투 1969-2000>에 실린 1999년 토론회에서 30년만에 다시 모인 전직 전공투들이 미시마 유키오의 죽음을 회고하는 대목은 괴이하게도 이들이 미시마의 죽음에 순교자를 대하듯 애틋한 감정을 품고 있음을 보여준다. 거기다 이들이 일본의 현안을 토론하는 모습을 보면 전공투가 왜 그렇게 흔적도 없이 소멸해 버렸는지를 참 잘 이해할 수가 있다(...). 이데올로기의 시대였던 1969년의 대담은 그렇다 쳐도 30년이 지나 이데올로기 시대가 끝나고 일본 버블 경제의 팽창 및 소멸, [[잃어버린 10년/일본|장기 불황]], 민주주의의 쇠퇴, [[일본의 우경화|급속한 우경화]], [[역사 왜곡]] 등등 현안이 산적한 1999년의 시점에서도 현실 인식과 역사 인식에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다. 이를테면 20세기가 몇 달 안 남은 시점에 그것도 우익 인사도 아닌 전직 전공투가 [[이시와라 간지]]의 사상에는 여전히 배울 부분이 있다느니, [[오족협화]]에는 [[대동아공영권]]과는 구분되는 긍정적 요소가 있다느니 하는 소리를 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 야스쿠니 참배 문제, 식민지 시절에 대한 사죄와 배상 문제, 따위는 한 마디도 안 나온다. 1990년대 후반 전세계를 덮친 [[1997년 외환 위기|금융 위기]]에 대해 논할 때는 공무원이 된 다른 전직 전공투가 그것은 전공투 세대의 잘못이 아니라 10년 쯤 윗세대인 안보 세대의 책임이라고 한사코 강변한다. 그 근거는 80년대 중반을 기준으로 당시 전공투 세대는 35살 정도로 발언력이 별로 없었고 45세 정도였던 안보 세대야말로 정부와 기업에서 책임 있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란다. 왜 하필 80년대 중반인지는 차치하더라도 전공투의 추억을 지키기 위해 공무원 논리를 끌어온 셈이다. 전공투의 가장 추악한 기억인 연합적군의 [[산악 베이스 사건]]에 대해서도 전형적인 "일부의 잘못" 논리로 비켜간다. 심지어 한 명은 당시 살해당한 사람들과 살인범들을 구분하지도 않고 뭉뚱그려 "그들(연합적군)도 일종의 피해자들"이라고 말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