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건영 (문단 편집) == 사업가 시절 == 1967년 4월에 정건영은 토우세이카이를 기업 형태로 개편한 '''토아유아이사업조합(東亜友愛事業組合)'''를 설립하여 명예회장 직에 올라 야쿠자 계로 복귀했고 이후 '''토아상호기업(東亜相互企業, 이하 TSK)'''을 창립, 자신은 사장을 맡고 [[코다마 요시오]]를 회장으로 취임시켰다. TSK는 [[요릿집]] 등의 [[유흥업소|유흥업]]과 [[부관훼리]] 운항, [[부동산]] 사업을 기반으로 하여 상당한 규모의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본격적인 사업가 활동을 시작한 정건영은 한국의 정재계 인물들과 친분을 쌓으며 재일 한국인 사회의 거물로 떠올랐고, 특히 [[대통령경호실장]] [[박종규]]와는 [[호형호제]] 하는 아주 막역한 사이였다. 정건영은 박종규의 비호를 받으며 [[김포국제공항]]을 드나들 때 통관절차도 생략하는 VIP 대접을 받을 정도였다. 그리고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 시 정건영은 [[코다마 요시오]]와 함께 조직원들을 동원하여 일본을 방문한 한국 정치가들의 경호 업무를 맡으며 막후에서 지원했다. 1966년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고 1968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으며, 1971년에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중앙본부 고문으로 취임했다. 1970년대 초반 대한민국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킨 [[정인숙 살해사건|정인숙]]이 도쿄에서 생활할 때, [[박종규]] 경호실장의 요청을 받아 정건영이 후견인 역할로 정인숙과 그녀의 아들을 돌봐주었다. 정건영은 그 댓가로 박종규에게 TSK가 [[한국외환은행]] 도쿄지점 에서 사업자금을 빌릴 수 있도록 부탁했고, 박종규의 지시로 외환은행 도쿄지점은 1968년 부터 TSK에 대한 대출을 개시했는데 이후 그 총액은 원금으로만 무려 100억엔을 넘어갔다고 한다(...). [[파일:TSK_CCC.webp]] 정건영이 야심차게 건설한 TSK・CCC터미널 빌딩 1973년 7월, TSK는 외환은행 도쿄지점이 서준 약 60억엔의 지급 보증을 바탕으로 '''일본부동산은행'''에서 54억엔의 융자를 받아 이 중 33억엔은 [[나스]] 고원 및 [[시라카와]] 고원 관광지 개발에 투자하였고 나머지 21억엔은 [[롯폰기]] 소재 '''TSK・CCC터미널 빌딩'''[* 여기서 CCC는 '''C'''elebrity '''C'''hoice '''C'''lub의 약자이며, 6층 규모의 이 빌딩에는 TSK가 운영하는 고급 회원제 클럽과 [[레스토랑]], 사무실 등이 입주하였다.] 건설 비용으로 썼다. TSK・CCC터미널 빌딩은 정건영이 표면적으로는 야쿠자 세계와 결별하고 건실한 사업가로서 새출발 한다는 징표였으며, 토우세이카이 조직원은 TSK・CCC터미널 빌딩에 입주한 TSK나 그 계열사 사무실에 출입하는 것이 금지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