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교회 (문단 편집) == 한국의 정교회 == 참고로 [[한국]] 정교회라는 명칭은 편의상 부르는 명칭이지, 공식 명칭은 아니다. 한국의 정교회는 어느 쪽도 아직 자치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엄밀하게는 [[러시아 정교회]]의 경우 "모스크바 정교회 대한교구"(통칭 대한정교회)로, 그리스 정교회의 경우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콘스탄티노폴리스 정교회]] 한국대교구"(통칭 한국정교회)라고 부르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한국에 정교회 선교가 시작된 이래로 [[개화기]]부터 [[8.15 해방|해방]] 후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교구로 넘어가기 전까지 한국에 세워진 정교회를 '''"대한 정교회"''' 또는 '''"대한 그리스도 정교회"'''라고 불렀으나 그리스 정교회로 넘어간 이후 '''한국 정교회'''로 통칭되게 되었다. 그러다 [[2018년 정교회 분열]]로 인해 한국에 러시아 정교회가 들어오면서 택한 이름이 '''"대한 정교회"'''인 것. 기록에 의하면 정교회와 [[한민족]]의 만남은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중세 [[원나라]]에 파견되었던 [[교황]]의 사절이 남긴 기록을 보면, 약 800년 전 원나라 황실은 비교적 그리스도교에 호의적이어서 러시아에서 온 대공(大公)을 후하게 대접했으며 그때 [[고려]]의 왕자들과도 접촉하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보다 직접적인 관계로 보면, 260년 전 [[조선]] [[영조]] 시대로 소급된다. 청나라 북경 사신 길에 올랐던 이윤신이 문견사건(聞見事件)을 쓰면서 대비달자(大鼻獺子, '코 큰 [[오랑캐]]'란 뜻)를 만났다고 기록했는데, 청나라에 파견된 '코 큰' 러시아 정교회 [[선교사]]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조선 사신단은 그들과 교분을 이루며 공어포와 [[인삼]]을 선물하였고, 러시아 정교회 선교사들은 조선 사신들에게 [[거울]]과 주화를 주었다고 한다. [[파일:Khrisanf_Schetkovskiy.jpg|width=300]] 한국의 본격적인 정교회 역사는 [[1900년]] 2월에 입국한 [[러시아 정교회]] 소속 흐리산프 솃콥스키(Хрисанф Щетковский) 신부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당시 [[러시아 공사관]] 인근 부지(지금의 [[경향신문]] 자리)를 구매하고, [[1903년]]에는 [[성당]]을 건립했으나, [[러일전쟁]]으로 선교사가 모두 추방되는 바람에 [[1906년]] 재입국이 허용될 때까지 제동이 걸렸다. 게다가 [[1910년]]에는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래도 [[1912년]]에는 첫 [[한국인]] 사제로서 이오안 강탁(Иоанн 姜倬) 보제가 신부로 서품됐고 이어서 자체 교육기관인 보정학교를 세우기도 했지만, [[러시아 제국|러시아]] 본국에서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공산화가 되면서 외국 선교부가 폐쇄되는 등 복잡한 사정으로 인해 한국을 신경쓸 수가 없게 되었다. [[1924년]]에는 루카 김희준(Лука 金熙俊) 보제가 사제로 서품됐으며 [[1936년]]에는 수도사제 폴리카르프 프리마크(Поликарп Приймак)가 관구장주교 세르기 티호미로프(Сергий Тихомиров)에 의해 제9차 한국선교회장으로 임명되었다. 폴리카르프 신부는 17개 도시에 퍼져 살던 약 150명의 신도들을 사목하였다. 1940년 일본 정교회는 정치적 이유로 모스크바 총대교구와의 친교를 단절하였는데, 1941년 10월 8일 [[일본 제국|일본]] 당국의 압력 아래 세르기 관구장주교는 폴리카르프 신부를 대수도사제로 승품하였고, 선교회의 전권을 맡겼다. [[1945년]] 8월 11일 세르기 관구장주교가 안식한 후, 선교회는 모스크바 및 전 루스 총대주교 알렉시 1세(Алексий I)의 교령에 따라 신설된 동아시아 총대주교대리구의 관할권에 편입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27일부터 모스크바 총대교구청에 소속된 상태로 폴리카르프 신부의 관리하 '임시 자치'가 공인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연합군 점령하 일본|일본]]과 [[남한]]이 [[미국]] 통제 아래, [[소련 점령하 만주|만주]]와 [[북한]]이 [[소련]] 통제 아래 들어가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된 와중에 소련 치하의 모스크바 총대교구와의 관계를 복구한 폴리카르프 신부의 행동은 [[미군정]], [[대한민국 정부]], 그리고 몇몇 백군파 러시아인 이민자들과 그들에게 추동받은 한국인 신도들의 불만을 야기하였다. 소련에 대한 반감이 심했던 한국 신도들은 모스크바 총대교구로부터의 이탈을 주장하였고, 모스크바 총대교구와 대립 중이던 러시아 정교회 북아메리카 관구(현 아메리카 정교회)의 러시아계 미국인 일본 주교 베니아민 바살리가(Вениамин Басалыга)에게 한국 교회의 후견을 맡아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에 베니아민 주교는 [[1948년]] 10월, 알렉시 김의한(Алексий 金義漢) 보제를 [[도쿄]]로 불러 사제로 서품하고 한국선교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같은 해 12월 12일, 성찬예배 후 알렉시 김의한 신부를 필두로 한 한국인 신도들은 폴리카르프 신부에게 [[북아메리카]] 관구로 선교회를 넘길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폴리카르프 신부가 거부하자 그를 강제로 [[성당]]에서 끌어내었고 그 과정에서 폭력사태가 발발하여 폴리카르프 신부가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후 폴리카르프 신부는 투옥되어 간첩으로 기소되었고 고문까지 당하다가 홀어머니와 함께 북한으로 추방당하였다. 물론 폴리카르프 신부는 소련의 간첩이 아니었다. 또한 이후 알렉시 김의한 신부마저 [[한국전쟁]] 중 납북되어 처형되고 전쟁 중에 날아든 포탄에 성 니콜라스 성당은 파괴되었다. 신도들은 모두 피난길에 뿔뿔이 흩어졌고 한국의 정교회 공동체는 와해되었다. 그리하여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는 중단되게 되었다. [[파일:1954_07_12.jpg|width=600]] 아무튼 교회 공동체의 핵이 되어야 할 [[성직자]]의 부재로 인해 맥이 끊어질 위기에 처했던 한국정교회는 [[6.25 전쟁]] 당시 [[그리스군]]의 [[군종 신부]]로 입국했던 안드레아스 할키오풀로스(Ανδρέας Χαλκιόπουλος) 신부가 선교에 힘쓰고 이듬해 1954년 평신도 보리스 문이춘(Борис 文履春)이 안드레아스 신부에 의해 일본 정교회로 파송되어, 북아메리카 관구 일본 주교 이리네이 베키시(Ириней Бекиш)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었다. 한국인 보리스 문이춘 신부가 일본에서 신부 서품을 받도록 도와주면서 점점 교세가 확장되었다. 6.25 전쟁 당시 참전한 그리스군 병사들이 월급에서 1달러씩 각출하여 성당 재건 기금으로 보태기도 했다. 현재 성당에 걸려 있는 [[종]] 5개 중 2개는 러시아 정교회가 전파되던 시절부터 남아 있는 종이고 3개는 한국전쟁 후에 제작한 것인데, 이 종 제작에도 그리스 참전 군인들의 성금이 들어갔다고 한다. 그런데 1955년 12월 25일, 보리스 문이춘 신부와 한국의 정교회 신도들은 북아메리카 관구 일본 교구로부터 이탈하여, 한국의 정교회 공동체의 관할권을 '그리스 정교회'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교구로 옮기는 안건을 발의하였다. 한국인들의 뿌리 깊은 [[반일]] 감정이 일본 정교회에 소속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해당 안건은 신도총회의 투표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한교구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대한교구의 주장: 현재 콘스탄티노폴리스 정교회 한국대교구에서는 신도총회의 만장일치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관할을 옮겼다고 말한다. 해당 안건은 신도총회의 투표에서 과반을 약간 넘은 상태였는데 찬성파가 반대파를 모두 추방하여 만장일치를 만든것이었다. 또한 신도총회 투표결과가 만장일치라 하더라도 신도총회는 소속 관할을 변경할 수 없다. 즉, 엄연히 [[교회법]]상 불법이다.][* 한국대교구 정교회 한국 대교구의 주장: 앞의 모스크바의 주장은 증명되지 않은 이야기이다. 먼저, 한국 정교회 대교구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 휘하에 있는것에 대하여 모스크바 총대교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정교회 공동체에 인정받는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오히려 모스크바가 한국에 설립한 교회가 분파상태로 파악되고 있다. 이것이 그리 심각한 문제로 여겨졌다면 타 정교회가 왜 모스크바 산하 대한교구를 정통으로 인정하지 않는단 말인가? 또한, 당시 전쟁 직후에 일본에 이어 사실상 적국과 다름없는 모스크바 소속 교회의 일원이 되길 희망하는 한국인들이 많았다고 주장하는것이 신빙성있다고 할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납북당한 김의한 신부의 따님은 콘스탄티노폴리스 휘하의 한국 정교회에 계속 출석하셨고 전쟁 이후 살아남은 백군계 러시아인들 역시 한국 정교회에 계속 출석했다.] 결국 1956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아티나고라스의 결정에 따라 한국 정교회는 콘스탄티노플 총대교구로 편입되었고, 이리하여 한국의 정교회 역사상 러시아 정교회 시대가 막을 내리고 그리스 정교회 시대가 시작되었다. 한국의 정교회 규모가 작은[* 그리스도교 신자수가 매우 적기로 유명한 중국과 일본의 신자수(각각 4%, 1%)보다도 훨씬 적은 '''0.005%'''이다.] 근본적인 이유도 이와 연관되어 있다. 다른 그리스도교 교파인 가톨릭과 개신교의 경우 이 교파가 주류를 이루는 서유럽 및 북미 국가들과 한국의 교류가 매우 활발했다. 이 과정에서 성직자 및 신자들의 교류도 빈번하게 이뤄질 수 있었고 이는 교세 확장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반면 정교회가 주류를 이루는 국가들은 [[그리스]]와 [[러시아]] 등 [[동유럽]] 국가들인데, 그리스를 제외하면 냉전 시절 모두 [[공산권]]에 속해서 한국과의 교류가 사실상 전무했다. 그리고 한국과 그리스의 교류는[* 그리스도 1967년에서 1974년 까지 [[그리스 군사정권]]이 있었으며 이 시대는 그리스에서도 가장 어둡고 암울한 시기였다. 또한 외국과의 교류등도 이시기에는 적었다.] 다른 가톨릭 및 개신교 성향 국가들과의 교류에 비해 큰 차이가 났다. 이러한 규모의 격차는 [[냉전]] 종식 후 러시아 및 동유럽 국가들과 공식 수교한 뒤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때문에 한국 내 정교회의 교세는 [[한국 천주교|가톨릭]] 및 [[한국의 개신교|개신교]]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