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정교회 (문단 편집) === 중세 === [[이슬람]]이 대두되고 나서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알렉산드리아 교회]],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안티오키아 교회]], [[예루살렘 총대주교|예루살렘 교회]]가 이슬람의 영역에 들어가[* 당연히 이에 대응한 동로마 제국은 12세기까지 안티오키아 탈환을 꾸준히 시도했고, [[십자군 전쟁]]을 포함해서 몇 번 성공하기도 했다.] [[교황|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콘스탄티노폴리스]] 두 교회만 남게 되었고, 경쟁은 가속화되었다. 그 이후 두 교회는 성상파괴설과 [[삼위일체론]] 등 신학적 문제, 그리고 현실적인 세력권 문제로 격하게 치고받고 싸웠다. 교황이 로마 교구 휘하의 주교들만이 참석한 시노드를 열어 교황의 권위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파문하거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유명무실해진 다른 세 총대주교들의 서명을 받아 교황에게 파문장을 날리거나. 물론 파문당한 장본인들은 서로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한편, [[키예프 공국]]의 대공이었던 [[블라디미르 1세]]가 989년 정교회를 키예프 공국의 국교로 선포하였으며, 이를 기점으로 현대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와 같은 [[루스]] 지역도 정교회 문화권으로 자리잡았다. [[파일:external/www.medievalchronicles.com/Map-Showing-Divide-of-Eastern-Western-Churches-During-Great-Schism-1054.gif]] 105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와 교황사절들의 상호 파문으로 최종적으로 [[동서 대분열|교회가 둘로 분열되었다]]. 이는 동로마 제국의 특이한 상황과 남부 이탈리아의 엇갈리는 이권에서 기인하였다. 전통적으로 동로마 황제는 너무나 거대하고 강력한 자국의 교회를 견제하기 위해 항상 로마와 제휴하곤 했다. [[11세기]] 동로마 제국은 내부의 세력 다툼으로 약해져 있는 상태였고, 황제의 권력 또한 매우 약해져 총대주교의 권력이 황제를 압도할 정도로 강해져 가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황제였던 [[미하일 7세]]는 교황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찍어 눌러 달라는 의미의 서한을 보냈다. 당시의 교황 [[레오 9세]]는 즉각 황제의 요구에 부임하여 로마 교회에서 가장 완고하며 호전적인 세 [[추기경]]을 사절로 보내 공의회를 개최하도록 했다. 그러나 당시 총대주교였던 미카일 케룰라리오스 또한 만만치 않은 인물로, 황제를 구워삶아 황제로 하여금 교황 사절로 온 추기경들을 오히려 적대하게 했다. 11세기에 노르만인들은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정복하여 이곳의 정교 교구를 강제로 교황에게 복속시켰는데, 이를 구실로 삼아 오히려 교황을 비난하게 한 것이다. 이 기간 중 내내 격렬한 논쟁이 오갔으며 양자 간 합의는 없었다. 결국 열이 단단히 뻗친 3명의 [[추기경]]들은 어느 날 밤 성 소피아 대성당의 제단 위에 총대주교에 대한 파문장을 올려놓고 로마로 떠나 버렸다. 다음날 아침 이것을 보고 격노한 총대주교는 그 세 명을 파문하고 교황의 이름을 기도문인 딥티호(Δίπτυχο)에서 지워 버렸다. 당시 동서 교회 간의 파문 사건들은 위에 말했듯 무척이나 빈번했지만, 이번 사건은 꽤나 양측이 격노할 만한 일이었기에 학자들은 이날 이후로 동서 교회가 최종적으로 분열되었다고 본다. 재밌는 점은, 당대인들은 이 사건들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동서교회 간의 불화와 분리가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이후 교회 분열은 [[십자군 전쟁]] 시기에 더욱 심화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제1차 십자군 전쟁]] 때부터 [[십자군]]들과 갈등을 빚었다. 1차 십자군은 체계적인 통제가 안 되는 집단이었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 내에서 약탈을 벌이는 집단들이 있었으며, 이들과 전투를 벌인 것은 사실이다. 이 외에 정치적 문제, 예를 들면 수복한 지역의 영유권 문제 등에 의해 십자군 지도자들과 긴장 관계에 있기는 했다. 물론 대체로 동로마 황제와 십자군 지도자들과는 충성 서약을 맺는 등 적대 관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은 십자군이 기대했던 전폭적인 지원(병력과 물자 지원)을 제공하지 않았고 좀 심하게 말하면 제국은 십자군을 [[이이제이|장기판의 말]]로 취급했다.[* 물론 이때의 동로마 제국이 내란과 외침, 경제난으로 사정이 좋지 않아 십자군을 도와줄 여건이 안 된 것도 있다.] 결국 제국군이 위기에 빠진 십자군을 돕지 않고, 십자군이 제국에 반환하기로 한 영토를 반환하지 않으면서 양측은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이밖에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라틴인 학살]] 등과 같은 사건으로 십자군과 동로마 제국 간의 사이에는 깊은 골이 파이게 되었으며 이 불신은 [[제4차 십자군 전쟁]] 중 일어난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으로 이어졌고, 이후 동방과 서방은 돌이킬 수 없는 불화에 빠져들게 되었다. 동로마의 한 역사가는 [[십자군|서방에서 온 십자가 든 악마]]보다는 차라리 [[이슬람교|동방에서 온 초승달 괴물]]이 훨씬 낫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십자군 이후로도 많은 신학적 차이들이 발생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14세기의 [[수도자]] 그리고리오스 팔라마스가 주창한 [[헤시카즘]]이다. 헤시카즘은 인간의 이성으로 하느님을 이해하자는 골자의 당시 서방 신학 주류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이론이다. 이는 간단히 말해 인간의 인지능력으로는 하느님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전제 아래에 논리적인 생각을 거부하고, 단순한 기도와 묵상을 통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평신도들에게는 호응을 얻었으나, 당연하게도 당대의 지식인들과 신학자들에게 큰 반발을 샀다. 헤시카즘은 [[고대 그리스]]부터 이어진 학문적 전통상 받아들이기에 매우 불쾌한 것이었고, 결국 팔라마스는 교회에 의해 파문되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당시 동로마 제국 내부의 정치적 투쟁에 이용되었고, 결국에는 세력의 방향추가 돌아가 교회가 팔라마스의 파문을 철회하고 헤시카즘을 정식 교리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로써 [[삼위일체론]] 이외에도 서방과 동방의 신학에 큰 괴리가 생겨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