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교회 (문단 편집) ==== 교황의 실질적 수위권 논쟁 ==== '''우선 정교회 측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교가 공인될 시기 로마 제국 시절에 총대주교좌는 [[로마]], [[알렉산드리아(이집트)|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에 있었다. 처음에는 오랫동안 제국의 수도인 로마는 당연했고 제국 제2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와 제3의 도시 안티오키아에 총대주교좌가 있었다.[* 알렉산드리아는 지금의 위상과 다르게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였고 경제적으로도 이집트가 로마 제국의 식량 창고 노릇을 한 [[곡창지대]]였다. 안티오키아도 지금은 소도시에 불과하지만 [[헬레니즘 시대]] [[셀레우코스 제국]] 시절에는 수도였고, 로마 시대에는 동방 무역의 중심지라 매우 부유해서 지금과 비교할 수 없는 위상이었다.] 그러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비잔티움)로 천도하고 나서 약간의 문제가 생겨났다. 콘스탄티노폴리스(비잔티움)이 새로운 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었으나 총대주교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초기 교부들과 공의회는 [[카파도키아]]를 비롯한 소아시아 출신 동방 교부들이 주도하기는 했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부상을 로마 측은 불쾌하게 여겼다. 비록 로마의 교회 내 위상에 제국의 (옛) 도읍이라는 정치적 배경이 없지는 않았으나 어디까지나 주된 이유는 '[[베드로]]'라고 여겨졌고,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각각 베드로에게[* 알렉산드리아는 [[마르코]]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연결되는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의 위상도 옹호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부상은 "지역 교회의 위상이 도시의 세속 정치적 위상에 의해 결정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과 연결되었다.[* 비잔티움 교회가 사도 안드레아에 의해 설립되었다는 이야기가 [[https://www.newadvent.org/cathen/04301a.htm|5세기]]에 나오면서 결과적으로 이 질문은 해결(혹은 미봉)되었다. [[러시아 정교|모스크바의 세속 정치적 위상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넘어서기 전까지는.]]] 더군다나 4세기 후반 안티오키아 출신 [[네스토리우스]]가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낙하산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가 되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선 강한 반발이 터져나왔다. 네스토리우스의 신학적 문제와 안티오키아 학파 대 알렉산드리아 학파 구도가 되면서 네스토리우스를 비롯한 안티오키아 학파는 [[에페소 공의회]]에서 축출되었고,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단성론은 [[칼케돈 공의회]]에서 나란히 축출되며 새로 서열을 조정하여 로마 다음의 지위는 새로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총대주교좌로 승격하고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는 한 단계씩 서열이 강등, 예루살렘은 성지의 특성상 새로이 승격되며 총 5곳의 총대주교좌가 성립이 되었다. 이후 서열에 관해 동방과 서방에서는 격한 논쟁이 오갔다. 일단 명예상으로는 로마의 주교가 가장 앞선다는 것에 동서방 양측은 동의한다. >Τὸν μέν τοι Κωνσταντινουπόλεως ἐπίσκοπον ἔχειν τὰ πρεσβεῖα τῆς τιμῆς μετὰ τὸν τῆς Ῥώμης ἐπίσκοπον, διὰ τὸ εἶναι αὐτὴν νέαν Ῥώμην. >Verumtamen Constantinopolitanus episcopus habeat honoris primatum praeter Romanum episcopum, propterea quod urbs ipsa sit iunior Roma.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는 로마 주교에 이어 명예 특권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 도시는 새 로마이기 때문이다. >----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http://www.papalencyclicals.net/councils/ecum02.htm|교령 3]]. 그러나 로마 주교는[* 이후에 Papa라는 용어가 굳어지는데, Papa라는 말은 본래 동서방을 막론하고 주교들에게 쓰이던 말이다. 곧,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이든 로마의 주교이든 모두 Papa인 셈. 이것이 영어 Pope나 한자어 교황으로 번역되면서 본래의 뉘앙스(아버지)와는 멀어졌지만, 본래는 특별할 것이 없는 칭호다. 괜히 21세기에도 교황들이 공식 직함에서는 꼬박꼬박 '로마의 주교' 등을 선호하는 게 아니다.] 모든 교구를 '''실질적으로''' 지배할 권리가 있다고 보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비롯한 다른 총대주교들은 로마의 [[교황]]이 사도들 중 첫 번째 서열인 [[베드로]]부터 사도직을 이어온 교회의 '''명예상으로''' 으뜸되는 주교라는 점은 인정하나, 어디까지나 다섯 총대주교 중의 한 사람이며 주교들 간에 서로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주장했다. 즉 로마 주교인 교황은 총대주교들 중 서열 순서에 따라 단지 명예상 1위에 해당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어쨌든 교황의 수위권 논쟁은 신학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쟁점으로,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가장 중요한 갈등이었다. 한편 동유럽이나 중동의 가톨릭 교회 중에서는 외견이 정교회 같은 종류도 있는데, 이는 [[동방 가톨릭 교회]]로써 교황의 수위권 아래로 들어간 옛 정교회 소속 교회들이다. 역으로 정교회로 넘어간 서방 교회 신자들도 있다. 아무래도 동서 교회가 분열될 때 교황의 수위권을 따르는 것을 거부한 교회들인 듯. 이런 이유로 가톨릭에는 동방 전례 교회가 덤으로 있고, 정교회에는 서방 전례 교회가 덤으로 있다. 사실 교회의 초기 구조를 따져보면 별로 이상할 것도 없다. 수위권을 어디다 두느냐의 차이일 뿐. 원래 동서 교회는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었을 뿐이다. 문제는 동로마 제국이 있던 시절에 황제의 권력과 부유한 동방의 재력 때문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영향력이 증가하고, 이것이 '서열상 1위'인 교황과 갈등이 일어난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가톨릭은 으뜸 주교인 교황이 실질적인 권한을 갖고 행사한다고 하지만, 정교회는 교황이라는 칭호부터 부정적이고 교황을 모두 동등하고 평등한 주교들 중의 대표 격으로 생각하기에 교황의 실질적 권한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도들로부터 이어진 명예로운 전통적 서열은 인정하지만, 사도들 간에 동등했기 때문에 수위권 같은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지금에 와서는 갈등의 이유가 많이 사라졌다. 다만, 하도 오래 연결이 끊어져 있다 보니 서로 모습이 너무 달라져서 다시 연결되기가 굉장히 힘들다는 것일 뿐. 또한 역설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완전히 아작난 상태라서 정교회 안에서 자체적으로 좀 다른 의미의 수위권 분쟁이 유발되므로, 더욱 합쳐지기가 힘들다. ~~[[러시아 정교회|모스크바라]]든가~~ '''이에 대한 가톨릭의 입장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교황수위권]] 문서에도 나와 있듯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 공인 이전, 빈번히 박해받던 교회 초기(1~3세기)부터 성경 문헌을 기초로 하여 [[베드로]]는 [[그리스도]]에게서 수위권을 받았다는 인식이 존재했고, 또한 전통적으로 로마 주교는 베드로의 후계자로 여겨졌기에 최종 결정을 베드로의 후계자인 로마 주교=[[교황]]에게 맡기는 일이 빈번했다. 즉 로마가 제국의 수도이고 지역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로마 총대주교'라는 직위 또한 중요하던 게 아니라[* 애초에 '로마 총대주교'란 직함 자체는 공식적으로 존재한 적 없으며, 굳이 따지자면 '''서방 총대주교'''란 명칭이 역사적으로 가장 부합한다.], '''총대주교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부터 로마 주교의 중요성과 수위권은 [[성전(기독교)|성전]]으로 존재하던 것'''이라는 것. 여기서 일단 동서방 양 교회가 합의하고 있는 점을 먼저 거론하자면, 가톨릭과 정교회의 신학자들은 초기의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 논쟁에 특히 동방의 교부들이[* 정확히 말하자면 이집트 학파와 시리아 학파. 동방 교회의 신학적 주도권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학자들이 쥐어잡은 것은, 에페소 공의회에서 시리아 학파가 타격을 입고, 칼케돈 공의회에서 이집트 학파가 타격을 입은 이후이다. 여기서 시리아 학파의 관점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면 [[네스토리우스파]]가 되고, 이집트 학파의 관점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면 [[단성론]](에우티키우스주의)이 되고, 그 중간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칼케돈 공의회]]의 합의이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신학에서 가장 목소리가 크던 두 학파가 몰락하면서 신학적 주도권이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동한 것이다.] 크게 공헌했다는 것은 모두 동의하고 있다. 이를테면 니케아 공의회부터 신학적 논쟁은 동방이 주도했고, 공의회의 주된 주제인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을 다룬 초기 교부들은 거의 다 동방 쪽 인물들이었다. 애초에 구약 70인역과 신약성서는 헬라어였고 예루살렘과 사도들의 사역은 동방이 위주인데다가[* 다만 베드로가 로마의 교회를 돌보았다는 전승을 회의적으로 보는 개신교와는 달리, 가톨릭과 정교회는 베드로가 로마 교회를 사역하고 로마에서 순교하였다고 본다. 물론 바오로도 로마에서 순교하였다고 보고.] 역사적으로 로마제국 시절 정치적으로는 로마에 정복되었을 지언정 문화적 학술적으로는 헬라 문화권의 영향이 오히려 로마를 압도했기 때문이다. 로마에서도 물론 실용 학문인 법률이나 건축 쪽이면 몰라도 다른 모든 학문의 권위를 헬라 문화권에 있는 걸 대체로[* 로마에서도 그리스 학문이 아닌 로마만의 학문을 강조한 학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대(大) 카토라든가.] 인정했기 때문에 로마시대 귀족들도 그리스인 선생을 가정교사로 모시거나 장성해서는 아테네나 로도스섬으로 유학을 보냈던 것이다. 물론 서방의 교부들이 아무것도 한 게 없냐 하면 그건 아니다. 은총론과 역사신학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활약했으며[*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은 동방에서는 서방보다 지지가 약하긴 하지만, 여전히 동방 교회에서도 존경받는 교부이고, 역사신학의 명저인 「신국론」 등 그가 은총론에서만 활약한 것도 아니다.] [[칼케돈 공의회]]의 그리스도론은 로마 주교인 [[레오 1세(교황)|레오 1세]]가 명백히 주도하였다. 그리스인들이 로마와 본격적으로 접촉하던 시기에 보여주던 라틴인에 대한 경멸은[* 로마와 접촉했을 때 그리스인들은 [[라틴어]]가 짐승끼리 꽥꽥거리는 소리로 들린다고 경멸할 정도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 시절에는 그 이전보다 상당히 희석되어 있었다. 물론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비그리스 지역에는 학문 자체가 존재할 리가 없다는 식의 경멸은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시점에서 이미 수백 년 전 이야기였다.[* 동방의 그리스도론과 성서신학을 명백히 주도한 이집트와 시리아부터가 그리스어권이 아니였고 다만 국제어로 그리스어가 통용된 지역일 뿐이었다. 라틴인들 역시도, 동방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경우에는 국제어로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당대의 그리스도론 논쟁을 보자면, 대체로 동방 교부들이, 특히 이집트와 시리아의 교부들이 그리스어를 국제어로 사용하며 주도하되, 서방 역시도 유의미한 영향을 끼치며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에페소 공의회]]에서 시리아 학파가[* 성서 신학에 있어서 역사적, 문자적 해석법을 선호.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을 강조. 극단주의로 [[네스토리우스파]]가 있다.] 타격을 받고, [[칼케돈 공의회]]에서 이집트 학파가[* 성서 신학에 있어서 알레고리적 해석법을 선호. 그리스도의 신적 본성을 강조. 이후 [[콥트 교회]]로 발전하고, 극단주의로 에우티키우스주의([[단성론]])이 있다.] 타격을 받으며,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학술적 주도권이 넘어간 것이라 보면 크게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교 공인 이후에도 속권으로는 초기 공의회의 소집이 로마의 주교가 아닌 황제의 주도로 행해졌다. 즉 초기 공의회는 신학쪽으로는 동방의 교부들이 주도하고, 속권에 있어서는 동방의 황제가 주도한 것이며, 이 부분 역시도 가톨릭과 정교회 양측이 모두 동의하고 있다. 사실 4대 공의회 시절만 하더라도 로마황제의 소집과 동방 교부들이 주도하였지, 로마 쪽에선 별로 신학자들이 오지도 않았다. 물론 7~8세기 이후 실질적으로 동서 간에 균열이 생긴 이후에는 로마에서 실질적으로 서방에 수위권을 주장했지만 이민족으로 초토화가 되어 로마의 권위로 대동단결하던 서방과는 달리 안정된 통치가 이루어지고 로마와의 물리적 거리도 먼 동방과는 의견 차이가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무슨 해석에 이견이 발생하여 동서방의 두 교회를 갈라놓은 것일까? 그것은 세계 공의회에서[* 지역 공의회와의 구분을 위해서 이렇게 부른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주도한 카르타고 공의회가 대표적인 지역 공의회. 현재 모든 그리스도교파에서 이단으로 선고된 펠라기우스의 사상은 로마에서 인기를 끌었는데 이것이 신학적으로 그릇됨을 아우구스티누스가 직접 반박했고, 교황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펠라기우스의 단죄로 결론난다. 또한 가톨릭 교회에서 받아들이는 73권의 정경 목록(동방과는 이견이 있다)이 자리잡은 것도 카르타고 지역 공의회의 공헌이다. 다만 지역 공의회의 경우는, 세계 공의회와 같은 권한을 지니지는 않기에 정경 목록은 다소 느슨하게 받아들여졌다. 이는 훗날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세계 공의회의 권한으로 확정하여 가톨릭 내부에서 이견이 사라졌다.] 가장 권위가 있던 주교를 누구로 해석하느냐의 문제이다. 이를테면 [[에페소 공의회]]의 경우, 치릴로는 첼레스티노의 권한으로 네스토리우스를 파문했다. 조금 더 깊게 파고 들자면, 사실 이때 로마 측에서는 3명의 사절을 보냈는데 도착이 지연되자 치릴로가 자신의 신념과 교황의 견해가 일치한다는 신념하에 도착하지도 않은 로마 측 권위에 호소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스울 수 있지만 당시 치릴로가 (당연히, 크든 작든 유형적으로 분명히 존재한다고 주위에 받아들여지던) '''[[교황수위권|로마 주교의 권위]]'''에 상당히 기대었던 건 뚜렷한 사실이다. >다른 이들에게 매우 존경받는 네스토리오스는 우리의 초청에 응하려고 하지 않았고 우리가 보낸 거룩하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주교들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네스토리오스가 야기한 불경에 대해서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낭독한 그의 서한들과 저서들을 바탕으로, 최근에 그가 '이 도시'에서 말한 것과 증인들이 확인한 것을 바탕으로, 우리는 그가 불경스럽게 생각하고 이러한 것을 선포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 따라서 법규들과 >● '''지극히 거룩한 우리의 아버지이자 동료이며 로마 교회의 주교인 첼레스티노가 쓴 서한에 따라,''' 우리는 네스토리오스에 대해 애통해하면서 어쩔 수 없이 다음과 같은 유감스러운 판결을 내리게 되었다. > >네스토리오스에게서 모욕을 받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극히 거룩한 이 공의회를 통해 네스토리오스가 주교의 품위와 사제가 참여할 수 있는 모든 집회에서 배제되었음을 확정하셨다. >---- >[[에페소 공의회]], 네스토리오스에 대한 [[http://www.papalencyclicals.net/councils/ecum03.htm|단죄]] 또한 [[칼케돈 공의회]]의 경우를 보자면, 역시 로마 측 사절에 의해 공의회가 최종적으로 승인되었고, 교황 [[레오 1세(교황)|레오 1세]]의 훈령에 따라 디오스코로스가 공의회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초기의 세계 공의회와 그 논제인 삼위일체론, 그리스도론 연구가 동방의 교부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이에 반해 서방의 경우 원죄론, 은총론 등 의화와 관련된 분야에서 강점을 보였다. 다만 원죄론은 동방에서 교의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초기의 세계 공의회라고 할지라도, 칼케돈 공의회의 경우 명백하게 교황 레오 1세가 신학적으로도 주도하였다.] 그 소집은 황제가 주도한 것은 맞는데, 어느 주교의 권위가 가장 높게 인정되었냐는 점에서 논의가 꼬여버리는 것이다. 에페소 공의회의 경우 네스토리오스의 파문에 로마의 권위가 있었고, 심지어 칼케돈 공의회의 경우 교황 레오 1세가 신학적 의미에서 공의회를 주도하기까지 했는데,[* 다만 칼케돈 공의회 교령 28조(콘스탄티노폴리스 시가 로마 시와 동등한 특권을 누리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교회 서열 2위로 격상)에 대해서는 로마 측이 동의하지 않았고, 이는 끝까지 합의를 못봤다.] 이러한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각각 아래처럼 해석함에 따라 논란이 발생하고 있다. 1. 교황이 수직적인 위계상으로 다른 동료 주교들보다 위에 있다. 2. 단지 동방의 주교들이 명예상 으뜸 주교인 교황을 존중해 줬기에 일어난 의례적 과정이다. 3. 교황 개개인의 카리스마 문제이지, 교황이라는 자리 자체가 가진 권위와는 별개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