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도전 (문단 편집) === [[조선]] 건국 이후 === 조선 건국 이후 정도전은 이성계의 신뢰를 받으며, [[권력]]을 가지게 되어 이제 막 세워진 나라의 정비를 갖추는 과정 거의 모든 부분에 참여해 조선의 기틀을 잡는 역할을 담당했다. 단, 정도전이 최고의 자리에 오른 적은 없다. 조선 건국 이후 재상의 자리는 배극렴과 조준이 차지하였고, 조준의 권력은 정도전을 충분히 견제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였다. 실제로 현대 대중들의 인식과 달리 조선 건국 과정에 조준의 역할은 결코 정도전보다 낮지 않았다. 다만 조준은 앞에 나서는걸 꺼리고 묵묵히 일하는 성향이었고 정도전은 이들보다 자리가 낮았지만 이성계의 개인적 신임을 바탕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이성계가 [[서울특별시|한양]] 천도를 밀어붙이자 비록 처음에는 [[천도]]에 반대했지만, 결국 이성계의 의중에 따라 천도 계획에 찬동했고, 천도가 확정된 후에는 새로운 수도 건설의 모든 것을 주도하고 결정했다. 궁과 성벽의 배치, 설계부터 완공까지 모든 건설을 주도했으며, [[경복궁]]의 전각이나 문 등의 이름은 대부분 정도전이 정했다.[* [[경복궁]]을 실제로 설계한 것은 [[김사행]]이다.] 국정 제도 전반을 개혁했으며 [[삼군부]]를 설치하고 [[사병]]을 혁파하여 군권을 장악했다. 조선 개국 후 이렇게 거칠 것 없이 잘 나가던 정도전에게 의외의 복병이 나타났으니, 그것은 명나라였다. 표전문 사건 등으로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가 악화되었는데, 특히 사건의 중심 인물이 된 정도전에게는 여러모로 타격이 컸다. 그러자 정도전은 [[제3차 요동정벌]]을 계획한다.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크게 두 가지 견해로 나뉘는데, 첫째는 정도전이 정말로 요동 정벌을 추진하고자 했다는 것이며, 둘째는 왕자들을 견제하기 위한 명분이었다는 것이다.[* 정도전이 각 지역의 왕실측근과 개국공신들이 사적으로 보유하던 사병을 국가의 정규군으로 개편하는 사병 혁파를 추진한 명분이 요동정벌이다.] 그러나 요동정벌은 명나라와의 전쟁은 명분이 없다며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고 개국한 조선의 정당성을 근간부터 갉아먹는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내로남불]]로 읽혀질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세자 책봉 과정에서 이성계가 말자인 의안대군 이방석을 세자로 선택해 밀어붙이자 그걸 지지한 것은 적장자가 세자가 되는 성리학 근본 질서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는 여지껏 조선이 성리학의 나라라며 불교 등 성리학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강경 탄압해왔던 정도전 스스로의 행적과 모순이 되는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내로남불]]이었고, [[신의왕후]] 한씨 소생 왕자들과 그 지지 세력들이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조정에서도 급진적인 개혁 성향과 강한 권력을 독점한 정도전에게 반감이 생기게 되었다. 조준 등 조정의 중신들도 하나둘씩 그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다. 또한 사병이 전부 혁파되지 못한채 남아 있었다.[* 사병을 모두 [[국가]]에 귀속시키자고 밀어붙이면 사병을 가진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과 다른 [[공신]]들이 정도전을 곱게 볼리 없다.] 그리고 명나라와의 [[외교]] 서한에 대한 표전 문제가 발생해 정도전을 소환하라는 위기까지 초래되었다. 이런 상황은 정도전이 다른 공신 출신의 [[재상]]들에게서도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정도전은 실권을 가진 [[부총리]] 급인 문하시랑찬성사를 지냈고, 좌시중(후에 좌정승)은 조준이 지냈다. 즉, 정도전은 실권을 가지는 자리에는 오를 수 있어도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는 어려운 인물이라는 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