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림사 (문단 편집) == 절의 구조 == [[파일:external/www.jeongnimsaji.or.kr/jeongnimsaji_01_img_02.gif]] 1942년 후지사와 카즈오(藤沢一夫)의 발굴조사에 따르면 정림사의 가람배치는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이 일직선상으로 놓여있으며, 강당 건물과 중문이 회랑으로 이어져있는 북위의 양식인 일탑식 가람배치 형식을 따르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백제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아서 세워졌다고 알려진 일본의 [[시텐노지]]에서도 볼 수 있는 가람배치 형식으로, 이후의 연구에서도 사비백제시대의 절은 모두 이런 형식을 따르고 있다는 의견이 정설이었다.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081120104828a000a010-001.jpg]] [[파일:external/image.munhwa.com/2008112001070230074002_b.jpg]] 그러나 2008년 정림사지를 재발굴 해본결과, 강당 좌우에 2구의 부속건물지와 강당 뒤의 승방지가 발견되었다. 다시 말해, 정림사의 가람배치 형식은 이전에 정설로 통하던 중문과 금당이 회랑과 바로 연결되어 있는 구조가 아닌 회랑이 각각 동회랑, 서회랑, 중문과 이어진 남회랑으로 분리되어있고, 동, 서회랑이 각각 금당 동, 서쪽에 위치한 부속건물에 이어져있는 형태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후 발굴된 능산리 사지와 왕흥사지의 가람배치도 이런 형식의 가람배치 형식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정림사는 이후 사비기 백제 사찰의 가람배치 양식을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기단은 기와를 쌓아만든 와적기단임이 밝혀졌으며, 현재는 불상의 보호각으로 세운 건물을 제외하고는[* 과거 문서에 이 건물이 강당의 복원이라고 서술되어 있으나, 해당 석불좌상이 고려시대 만들어진 것을 감안하면 복원이라고 보기는 애매한 점이 있다.] 이 와적기단 유구만 복원했다.[* 다만 복원조감도와 복원계획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떠돌아다녀서 조만간 완전복원을 할 의향도 있는 듯하다. 이미 [[백제문화단지]]라는 선례도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성도 어느 정도 존재하는 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