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민철 (문단 편집) == 여담 == || [[파일:/listimglink/6/2013113014462244960_1.jpg|width=100%]] || || 2013 한일 프로야구 레전드 슈퍼 매치에서 한국 대표로 역투하는 모습. || * [[충남중학교]] 재학 시절 또래보다 키가 늦게 자라서[* 훗날 21살에 고등학교를 졸업했을때도 겨우 180 근처의 키였다고 한다. 만 20세가(21살)이 되어서야 프로에 왔음에도 그때부터 성인의 나이로도 키가 쑥쑥 컸다고 한다. 확실히 늦는 체질인듯.] 중학교 3학년때 원하던 [[대전고등학교 야구부|대전고등학교]] 진학을 못하는 상황[* 초등학교 야구부 시절부터 중3때까지 주전선수로 정식 대회를 한번도 나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 본인이 키도 작고 많이 왜소했었다고 스스로 회고했다. 참고로 똑같은 케이스가 [[박철순]]인데, 이쪽은 유급을 두번이나 해서 고등학교를 22살에 졸업했다. 근데 하필 정민철이 야구선수를 결심한 계기도 박철순이다. 초등학교 4학년때 프로야구가 생겨서 부친에 의해 야구장에 갔다가 박철순(당시 OB는 대전팀이었다)의 등판 경기를 보고 그의 매력에 흠뻑 빠졌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바로 다음주에 학교 야구부를 신청했다고 한다.]이 왔고, 재도전을 위해서 1년 유급을 선택했다. 동기가 선배가 되고, 후배가 친구가 되는 생활을 대학에서 몇 해 더해야 돼서 자연스럽게 프로로 직행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대학교에 진학한 동기(1972년생)보다 3년 빨리 프로에 입문하게 되었다. 고3 시절 [[황금사자기]]에서 활약한 이후로 [[고려대학교 야구부|고려대학교]] 입학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https://m.sports.naver.com/kbo40/legend/18|#]] * 1년 유급으로 인해 같은 학년으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이유인지 1973년생과 친구로 지내는 듯 하다. [[한화 이글스]] 투수코치 시절에 1973년생인 [[박찬호]]와 합동 인터뷰에서 둘이 친구로 지내고 있음을 [[https://sports.donga.com/sports/article/all/20120224/44313375/3|확인할 수 있으며]], 자신의 한화 이글스 후임 단장인 1973년생 [[손혁]]과 편하게 반말을 하면서 [[https://youtu.be/A-KXaMqE1PM|친구로 지낸다.]] 이러한 이유로 1973년생 92학번 세대에 비공식적으로 정민철도 포함하는 경향이 있다. * 한화 구단이 영구 결번한 등번호는 23번. 그러나 정민철이 전성기 동안 달았고 가장 오랜 기간 달았던 등번호는 55번이라는 점에서 논란이 있었다.[* 1992년 입단할 때,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에이스 [[오렐 허샤이저]]를 좋아해서 달았다고 전해진다.] 23번의 경우, 2004년 부진한 성적 탓에 다음 해인 2005년 기분 전환으로 바꾼 번호[* 본인이 [[마이클 조던]]을 좋아해서 그의 등번호인 23번으로 했다고 한다.]였다. 그런데 정작 전성기 시절 포함, 선수 생활 내내 달다시피했던 55번이 아닌 23번이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다보니 팬들 사이에서 아쉽다는 이야기가 꽤 자주 나오고 있지만, 일이 이렇게 된 것은 [[프런트]]의 책임이라고 볼 수 없다. [[윤규진]]에게 등번호를 물려준 것이 '''정민철 본인의 의사'''였기 때문. [[윤규진]]은 정민철의 초-중-고 직속 후배로 어렸을 때부터 55번을 달았다고 한다. 은퇴 당시 프런트에서 영구 결번으로 55번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 묻기도 했다지만, 그 경우 후배가 사용 중인 등번호를 뺏는 셈이 되기 때문에 정민철 스스로 포기, 결국 23번을 선택했다. 어찌 되었건 정민철 본인의 선택이기에 존중해야 한다. 그 후 55번은 2021년부터 [[강재민]]이 사용하고 있다. * [[서울 삼성 썬더스]]의 [[이상민(농구)|이상민]] 감독과는 대전고등학교 재학 시절부터 친구였다고 한다. 홍대부고 재학중이던 이상민이 매년 대전고로 전지훈련을 오게 되면서 우정을 쌓았다고 한다. * [[한화 이글스]]의 열혈 팬으로 유명한 개그맨 [[남희석]]과도 친분이 있으며 사석에서는 서로 형동생 할정도로 친하다고 한다. 본인에 의하면 남희석은 "모든 걸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한 형"이라고 한다. * [[응답하라 1994]]에서 [[칠봉이]]의 모델이 된 선수들 중 하나가 정민철이라고 한다. * 특이하게도 결혼식(1999년 3월 14일)을 [[계룡대]] 내의 한 군인회관에서 올렸다고 한다. 장인어른이 군장교라서 그런 듯. 직속 상관은 아니었다고 한다. 부인 김경아와의 만남은 극적인데, 1993년 군부대에서 단기사병(방위)으로 근무할 때 한 여고생이 매일 위병소 앞을 지나가서 안면이 있었다가 5년뒤인 1998년, 대전에서 포켓볼 치는데 누가 다가와서 "아저씨, 나 몰라요?" 하길래 봤더니 그때 그 여고생이었다고. 유튜브 채널 서경석TV에선 방위 때는 말도 못 걸고 있다가 우연히 커피숍에 만나서 열심히 대쉬했다고 한다. 당시에 정민철은 팔꿈치 부상으로 6,7월을 날리고 재활 중이었는데 낮에 재활을 마치고 저녁엔 시간이 나서 자주 만나다가 복귀 후 후반기에만 9승을 거두며 7년 연속 10승을 달성했고, 이듬해 스프링캠프 다녀오자마자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 2005년 결혼식을 올린지 무려 6년만에 첫 득남했고, 그후 3년 뒤인 2008년 둘째를 득남했다. 2009년 9월 12일 대전 구장에서 열린 정민철의 은퇴 행사에 큰아들 우영군이 특별 시구를 맡았다.[[http://m.joynews24.com/v/442224|#]] 두 아들들에게는 운동을 권유하진 않았다고. 이유는 만일 [[이정후]]처럼 했다면 시켰겠지라고.[[https://m.sports.naver.com/news.nhn?oid=144&aid=0000553774|#]] * 모난 데 없는 순한 성격에 특유의 눈웃음과 선한 미소가 잘 어울리는 선남형 인데다 대전 최고의 프랜차이즈였기 때문에 연고지에서의 인기가 대단하였다. 은퇴 직전인 2009년에 살이 엄청 불어버렸지만 코치 선임 이후 다시 살이 빠져 예전의 모습을 많이 되찾았다. [[허구연]]의 말로는 선수 시절 잘 생겼었기 때문에 정민철이 젊었을 때 TV에서 전 경기를 중계했었다면 여성팬들이 많았을 것이라고 한다. 여성 팬덤으로 유명한 [[정수빈]]보다 더 많았을 거라고. * 지역의(정민철-대전, 김원형-전주) 프랜차이즈에 커브가 주무기[* 전성기 정민철의 커브는 주무기였던 돌 같은 직구를 받혀주기 위한 부무기였고 전성기 [[김원형]]의 커브는 희대의 마구인 주무기였던 점에서 차이가 있긴 하지만...]인 미남 투수라는 점에서 [[김원형]]과 비견되는 경우도 꽤나 있었다. 공교롭게도 둘 다 1972년생 동갑내기다. [[파일:attachment/정민철/2014-04-12-17-22-51-1.jpg]] * 마구마구 2015의 정민철(가명: 윤지현) 레전드 카드는 유니폼은 빙그레인데 '''한화 소속 선수'''로 적용되는(...) 오류가 있었으나 2014년 4월 20일 현재는 제대로 한화 유니폼 착용 상태. 그리고 커리어 하이는 1999년인데 1994년이 엘리트카드로 되어 있다.[* 다승을 기준으로 하면 1999년이 커리어 하이이나, 1994년의 평균자책점이 낮은 편이다, 그러나 1999시즌은 심각한 [[타고투저]]시즌 이였기에, 1999년을 커리어 하이로 뽑아도 무방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1994년 이닝, 평균자책점, 탈삼진 1위에 WAR도 1999시즌인 5.9보다 2.8높은 8.7이지만 [[정명원]]의 KBO 최초 40세이브 때문에 골든글러브 수상 실패 등으로 1994년이 가려져 1999시즌이 커리어 하이라고 아는 사람들이 많다. ][* 1994시즌 WAR 1위는 [[이종범]](11.7), 3위는 [[정명원]](8.0)] * 2000년대 초중반에, 1972년생이라 다른 팀 가면 최고참 급이지만 소속팀이 [[한화 이글스]]라서. 커피 심부름을 했던 사진도 있다. 물론 기자들 앞에서 장난 삼아 한 것. 정민철 이후에는 [[현대 유니콘스]]에서 수혈한 [[최영필]]이 이러한 설정을 물려받기도 했었다. * 리그 구조상 프랜차이즈가 많은 한국 프로야구, 그 중에서도 특히 프랜차이즈 스타가 많은 [[한화 이글스]]지만, [[대전광역시]]만으로 따졌을 때 한화에서도 보기 드문 대전 사람.[* 한화의 레전드 중 대전 출생은 정민철과 [[강석천]], [[구대성]] 세 명뿐이다.] '''그런 걸 떠나서 2014년까지 평생 동안 대전을 벗어나 살아본 것은 단 2년뿐이다.''' 요미우리에서 선수 생활을 했던 2000년, 2001년을 제외하고는 남들처럼 대학에 진학하느라 다른 도시에서 살아본 적도 없고, 코치 연수한다고 외국으로 나가 생활한 적도 없다. * 1990년대를 풍미했던 일본 여자아이돌 [[SPEED]]의 팬이라고. * 위에도 언급했지만 방위병 출신인데 [[제32보병사단|32사단]]에 입소해서 훈련 받았었다고 한다. * 요상하게도 [[똥]]과의 악연이 조금 있다. 2016 시즌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 파크]] 중계 당시 똥을 발에 묻히고 중계석에 들어온 적이 있다. 당시 같이 중계를 했던 [[박재홍(야구)|박재홍]]은 이를 회상하며 "해설 4년 하면서 똥을 밟고 중계실에 와서 중계실 바닥에 묻힌 사람은 정민철이 처음일 거다"라고 하기도 했다. 그리고 [[괌]]에서 골프 치던 도중에 똥을 밟아서 잔디에다 똥을 닦아낸 적도 있다고. * '선수가 없다면 키워서 쓰면 된다', '신인들에게 기회를 주며 경험을 쌓게 해줘야 한다', '투수마다 체력이 다르니 코칭스태프가 잘 판단하여 기용해야 한다' 등의 발언으로 [[김성근]]의 투수 운용을 정면으로 비판한 적이 있다.[* [[https://tv.kakao.com/v/78556546|#]]][* 그런데 정민철의 저 발언들은 김성근 감독이 야인으로 있을 때 "한화 투수들은 지옥에서 던지는 것이다."는 평과 함께 한화의 문제점을 진단하며 했던 발언과 거의 비슷하다.] 이 때 시범으로 양쪽 팔을 모두 굽혔는데, 공을 계속 던졌던 오른쪽 팔이 완전히는 구부러지지 않아 강한 인상을 남겼다. 물론 [[노리타(김성근)|감독 팬]]들이야 '정민철에 대한 추억은 없지만, 이글스 팬으로서 감독님 욕하는 건 참을 수 없다'는 식의 어처구니없는 발언을 팬 게시판에서 하며 난동을 부렸지만... * 2017년 5월 21일, [[1박 2일/2017년#s-11|1박 2일]]에 출연해서 "이 방송 보시는 10개 구단 단장님들, 제 눈 살아있습니다" 라고 본인을 어필하였다. 현직 복귀를 꿈꾸고 있는 듯. 이 날 야구공으로 인형 맞히기 게임에서 25구를 던진 끝에 인형을 맞혔으나, 뒤이은 [[이향]] 아나운서가 '''단 1구만에''' 인형을 뽑으며 비교가 되었다. * [[나 혼자 산다]]에 한때 팀 후배였던 [[윤현민]]이 고정으로 합류하면서, 준레귤러 멤버 수준으로 자주 등장했다. 상기의 1박 2일 촬영 당시에도 1박 2일 스케쥴이 끝난 후 곧바로 나 혼자 산다 촬영을 소화했을 정도. 단순히 같은 팀의 대선배였던 점도 있겠지만 마침 정민철이 [[MBC SPORTS+]]의 해설위원이었기 때문인 듯 하다. * [[류현진]]과 [[배지현]] 아나운서의 중매자가 되었다. 본인 말로는 차분한 두 사람 성격이 잘 맞을거 같다는 이유로. '''그리고 그 둘은 얼마 안되어 결혼했다.''' * 2019년 3월 [[서경석]]TV에 출연하여 2019시즌 한화 이글스의 전망을 했다. 끝에 서경석과 손바닥 크기 비교도 했다. [[https://youtu.be/jo2REMXGy1w|서경석 TV 영상]] * [[차명석]] LG 트윈스 단장과 친하다. 둘 다 92년 신인이고 그 해 데뷔했다). 한화가 2020년에 18연패를 달릴 때는 단장직이 너무 힘들다고 자기한테 전화를 걸어서 하소연했던 게 하루이틀이 아니었다고, 차명석 단장이 스톡킹에 출연해 밝힌 적이 있다. * [[컴투스 프로야구]]라는 게임에서 가장 유명한 선수인데, 게임 내에서 매우 얻기 어려운 레전드 등급의 카드를 정민철만 공짜로 주기 때문이다. 유저들에게는 주로 '레민철', '모두의 민철' 등으로 불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