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병주 (문단 편집) === [[12.12 군사반란]] 당시 행적 === [[1979년]] 12월 12일, [[12.12 군사반란]]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서울 근방 부대 중 '''쿠데타에 반기를 든 3명의 장성 중 1명'''이었다.[* 다른 2명은 [[장태완]] 수경사령관, 그리고 [[김진기]] 헌병감이다. 실제로는 3명 외에도 꽤 많은 장성들이 반란군에 동조하지 않았지만, 작전참모 등 휘하 전투병력이 없거나 있더라도 정보 부재, 안보 우려 등으로 병력 투입을 주저해서 12.12 당시 실병력을 실제 동원했던 지휘관은 3명이 사실상 전부였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정예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게 정병주 특전사령관이었다.] 이때 반란을 준비하던 [[보안사]]와 [[하나회]] 소속 장교들은 12.12가 일어나기 1주일 전부터 계획을 짰는데,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법 체포하고 친 정승화 혹은 비 하나회 계열의 군인들로 분류한, 저항하면 골치 아픈 주요 지휘관 정병주, [[김진기]] 그리고 [[장태완]] 등 3인을 [[술자리]]에 초대, 우국일 보안사 참모장[* 당시 계급은 [[준장]]이다.], [[조홍(군인)|조홍]] 수경사 헌병단장[* 당시 계급은 [[대령]]이다.]을 동석시켜 그들의 발을 묶어놓는 모략을 꾸몄다.[* 이른바 작전명 '''생일집 잔치'''. 이때 이들의 임무는 3명을 만취시켜 지휘 불능 상태로 만드는 것이었다고 하는데, 김진기가 술자리 참석 전 부하들에게 술집 전화번호를 알려줬고 총장이 납치되자 얼마 안가 연락을 해 결과적으론 실패했다.] 대망의 1979년 12월 12일, 정병주는 김진기, 장태완 등과 술자리를 같이 하다 전두환이 안 와서 의심을 품기 시작했고 정승화 총장이 납치되었다는 걸 듣게 된다. 그들은 술자리에서 일어나 각각 [[수경사]], [[육군본부]] 그리고 [[특전사]]로 돌아가 상황을 파악했는데, 이미 휘하 부대 중 하나회와 연관이 있는 다수 부대가 상관을 배신하고 전두환의 보안사 쪽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정병주 역시 특전사령부 소속 중 자기가 가장 아꼈던 직속부하 [[박희도]] [[제1공수특전여단]]장, [[최세창]] [[제3공수특전여단]]장 그리고 [[장기오]] [[국제평화지원단|제5공수특전여단]]장이 반란을 일으킨 하나회 소속 장교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접하게 된다.[* 다른 특전 부대들도 더 있지만, 수도권에 있는 부대는 당시 1,3,5,9특전여단이 전부였는데, 비육사/비하나회 여단장, 참모장이 맡고 있던 9특전여단 빼곤 죄다 배신을 때린 것.] 그러나 그는 마음을 잡고 대응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먼저 그는 특전사 부사령관 이순길 준장을 시켜 1공수를 막으려 했다. 또,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병력 출동을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믿을 수 있는 병력이 현재 없다."라고 전화하자 정병주는 "나에게는 9공수가 있다. 9공수 윤흥기 준장하고 참모장은 [[갑종]] 출신이라서 그들하고 연줄이 하나도 없다. 9공수라도 빨리 출동을 시키겠네."라고 하고 곧바로 9공수 윤흥기 준장에게 [[보안사]]와 [[경복궁]]에 있는 30경비단을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실제 정병주의 예측은 맞아떨어져 9공수는 출동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이 소식은 군 통신망을 감청하고 있던 보안사에 바로 들어가게 되었고, 하나회는 그냥 놔두면 자신들의 반란이 성공하지 못 할거라는 걸 직감했다. 이에 그들은 [[제3공수특전여단]]장인 최세창에게 정병주를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최세창은 그래도 자기 상관인 정병주를 어떻게든 회유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자 10분 후, 예하부대 대대장[* 제15특전대대장.]인 [[박종규(1944)|박종규]] 중령에게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처음에는 박종규도 상관을 체포하라니 반신반의했지만 결국 명령에 따르고 만다. 특전사령부 사령관실이 3공수내에 있었고 특전사령관 직속 전투병력이 없어서 박종규 대대장과 15대대 체포조는 아주 쉽게 사령관실을 공격할 수 있었다. 이때 사령관 비서실장인 [[김오랑]] 소령은 하나회의 회유를 거부하고 단신으로[* 다른 사람들은 모조리 도망쳤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지키기 위해 사령관실로 정병주를 피신시켰다. 그리고 반란군들이 특전사령관실에 도착한 후 김오랑은 권총으로 반란군과 교전 중 [[전사]]하고 정병주 특전사령관 역시 팔에 총상을 입은 채 반란군에게 체포당하고 만다. 참고로 그때 9공수는 자기들의 사령관이 피격당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보안사와 경복궁 30경비단을 공격하기 위해 서울로 진격하다가 진압군과 반란군이 서로 유혈 사태는 피하자며 맺은 [[신사협정]]에 의해 진압군 육군본부 측의 명령으로 돌아가게 된다. 허나 그것은 반란군의 기만술이자 진압군 최대 실수였고, 하나회 병력들이 서울로 들이닥치면서 반란은 성공하게 된다. 그 결과 정병주 자신에겐 암울한 상황만 남게 되었는데, 반란이 끝난 후 정병주는 강제 예편당하게 된다. 김오랑이 자신을 지키다 죽은 것은 김오랑의 안장식 날이 되어서야 알았다는 말도 있다. 이후 한동안 신군부가 요원을 보내 감시하면서 전화도 대신 받는 등 늘 따라다녔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