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병주 (문단 편집) === 죽음과 의혹 === 강제예편된 이후 그는 꾸준히 12.12 사태에 대한 국내외 자료를 수집하고 부당성을 주장했다. 신군부측의 회유도 있었지만 거절했고[* 사실 자신을 지키다 떠난 김오랑 소령의 죽음을 생각하면 정병주 성격상 도저히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6월 항쟁]] 이후 1987년 11월에는 [[김진기]] 장군과 함께 신군부의 만행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88년]] [[10월 16일]] 밤 10시에 자기 집 앞에서 따라나오던 여동생을 만류하고 사라졌다. 이후 실종 139일 만인 이듬해 3월 4일에 송추 인근 야산에서 목매달아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심지어 시계는 1988년 '''[[10월 19일]]'''에서 멈춰있었다. 만일 자살이 아닌 타살로 인한 사망이었다면 그 과정에서 고인의 몸에 충격이 가해진 탓에 10월 19일에 사망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당대에도 그의 죽음은 나름 큰 이슈였기 때문에 [[부검]]을 했고 그 결과, 우측 목 부분에 집중적으로 색흔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정병주가 목을 맨 나일론 끈 매듭에 우측 목 부분이 눌린 것을 직접 사인으로 보았다. 이외에도 조카를 위해 물상보증을 서줬다가 해당 업체가 부도나서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었기에 수사당국은 그가 자살한 것으로 보고 사건을 결론지었다. 하지만 당시 정병주는 물상보증을 선 집 말고도 다른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제일 논란을 지핀 것은 정병주의 시신이 발견된 곳은 정병주가 생존했던 시점까지 군부대가 주둔해서 출입통제지역으로 분류되었던 곳이다.[[https://www.hankyung.com/article/1989030500221|#]] 굳이 세상을 하직하려고 하는데 철조망을 파헤쳐가며 군부대 출입통제지역으로 들어가 목을 매는 것은 상식적으로 선뜻 이해가진 않는 행동이다. 때문에 그가 타살 당했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상당했는데, 12.12 이후 정병주 소장과 수시로 연락하며 지낸 [[장태완]] 소장 역시 그가 절대 자살할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고인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장태완과 정병주 둘 다 죽을 때까지 가톨릭 신자였다.], 당시 가톨릭 교리에서 자살은 용서받지 못 할 큰 죄 중 하나다.[* 과거에는 '''[[장례 미사]]도 못 올릴 만큼 사죄(死罪)'''로 취급하였다.] 살벌한 제5공화국 때에도 장태완 소장에게 '12ㆍ12의 진상규명에 조력, 역사의 증인으로 살아남아야 하니 서로 몸 조심하자'고 말하는 등[[http://blog.daum.net/gopcorea/9735861|#]] 자살을 택할 인물도, 정황도 아닌 것이 그 이유. 천주교 내에서도 정병주를 위해 [[죽은 이를 위한 미사#s-4.1|장례 미사]]를 치르는 것이 맞냐는 논란이 있었지만 당시 명동성당 주임사제였던 조순창 신부는 원인 미상이라는 이유로 집전을 했다. 정황상 당시 교구장이었던 [[김수환]] [[추기경]]에게도 보고는 되었겠지만 김 추기경이 어떤 의견을 남겼는지 전해지지 않는다. 민주화 이후 군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도 재조사가 이뤄졌지만, 조사 결과 자살로 분류하기에는 의문점이 있지만 '''당시 증거물이 거의 없어'''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만약 타살일 경우 일반 범죄자의 우발적 범행으로 살해 당했을 확률보다는 아무래도 '''권력 집단에게 암살 당했을 가능성'''이 더 커보이는데, 마침 당시 대통령도 [[하나회]] 출신 [[노태우]]였다보니 더 그런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노태우 정부엔 하나회 출신 인사들도 많았기에, 당시에도 언론과 인터뷰하며 하나회를 디스하던 정병주는 그들에겐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결국 과거 전력이 있으니 [[국군기무사령부|국군보안사령부]]나 [[국가안전기획부]] 같은 정보기관 소행이 의심될 수 밖에 없다. [[김오랑]] 중령의 부인 백영옥 여사는 시력약화증을 앓고 있었는데[* 김오랑이 소령을 단 뒤 진급에 유리한 야전부대 대신 특전사령부에 남아있었던 이유도 아내의 병 치료 목적이 있었다. 치료를 위해선 자대가 서울 인근에 있는 것이 당연히 나았기 때문.], 남편의 죽음으로 충격이 심해져 아예 [[실명]]하고 고생이 많을 때 정병주는 손수 찾아가 위로하면서 남편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89년 변사체로 발견되면서 백영옥 여사는 뜻을 이어받겠다고 90년 하나회 관련 소송도 거는 등 적극적으로 나섰지만, 그녀도 1991년 6월 28일 평소 봉사 활동을 하던 시설에서 추락사한 채 발견되고 만다. 당시 경찰은 처음에는 자살로 발표했으나 유족들의 강력한 반발이 있자 슬쩍 실족사로 수정했다고 하는데, 사실 실족사도 떨어진 높이가 그리 높지도 않았기에 의문이 남았다. 정병주의 시신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고인의 무덤 [[묘비명]]은 '''백비'''. 즉, 비석의 내용이 없이 그냥 [[이름]]만 적혀있다. 무명 용사들도 공적을 기리는 한 줄의 비문이 항상 적혀 있게 마련인 무덤에서 아무런 내용이 없는 것으로, 이는 유족들의 뜻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명령을 생명으로 여기는 군인들이 상관에게 총질을 하고도 버젓이 활보하는 세상에 고인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라는 뜻이라고 한다. 자식들의 말에 따르면 말버릇처럼 자신이 죽은 후에도 [[김오랑]]의 묘소에 [[참배]]하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