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분 (문단 편집) == 후손 == 후사는 사촌형인 홍주목사 정효안(鄭孝安)에게 당부하여 정효안의 장남이자 자신의 5촌 조카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0945|정지산]](鄭之産)[* 전 호조정랑. 당시 현감.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친아버지와 함께 벼슬을 그만두고 은진 대암으로 내려왔다가 정분의 봉사손이 되었고, 이후 정분이 친구, 동료인 김종서의 고향에 매입해놓은 공주 요당에 양어머니(정인지의 누나는 계유정난 이전에 사망했으므로 후처인 원주 변씨)를 모신다. [[김시습]] 등과 [[계룡산 초혼각지]]에서 초혼제를 올렸으며(단묘초혼칠현신) 평소에 친분이 있던 세조가 등용하고자 했지만 응하지 않았다.]이 봉사손이 되어 이었고 도망가서 미친 척하며 숨어 산 아들이라는 정광로(鄭光露)의 후손이 나중에 나타나 묘의 지석을 근거로 같이 복권됐다. 복권 이전부터 봉사손의 후손인 [[공주시|공주]]계는 [[채제공]] 계열의 [[근기남인]]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고,[* 계룡산 초혼각지의 초혼제를 기록한 초혼각기를 쓴 정지산의 현손 연기현감 [[http://sejong.grandculture.net/sejong/toc/GC07700637|정천경]](鄭天卿)이 서인의 모함에 휘말렸다가 [[이덕형]]이 도와줬기 때문.] 나중에 나타난 후손 계통인 [[광양시|광양]]계의 이야기가 [[노론]]과 [[영조]]의 입맛에 맞았기 두 집안의 송사는 당시부터 붕당 간 갈등에 휘말려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으며, 간혹 논문 주제로도 튀어나온다.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가]]이자 부동산 개발업자 [[정세권]]은 그의 15대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