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삼흠 (문단 편집) === [[MBC 청룡]] 시절 === [[파일:정삼흠.jpg|width=300]] 첫 해에 선발과 계투를 겸업한 정삼흠은 무려 192이닝을 소화한다. 이 후유증 때문인지 2년차에는 부진했고, 3년차인 1987년부터 다시 선발투수로 자리를 잡는다. 고려대 동기인 [[선동열]]과의 취중 대결도 이 때 벌어졌는데, 1987년 9월 2일 경기를 앞두고 둘이서 술을 왕창 마신 다음[* [[MBC 청룡]] [[김동엽(1938)|감독]]이 [[선동열]]의 컨디션을 [[영 좋지 않은 곳|영 좋지 않게 만드려고]] 지시했다고 하는 소문도 있다. 그러나 인과 관계가 제대로 확인된 건 아니니, 설레발은 금물.] 취한 상태로 등판. 그리고 그 결과 정삼흠은 7이닝 5실점으로 패전 투수가 되고, [[선동열]]은 완봉승을 거두었다. 이후 '''“새벽까지 아무리 먹여도 다음 날 보면 싱싱하니, 결국 나만 망가졌지 뭐.”'''라고 회고하였다. [[http://sports.news.nate.com/view/20120619n04270?mid=s1001|#]][* 그런데 다른 말로는 정삼흠이 7이닝 2실점을 했다거나 5실점 완투패를 했다거나 심하게는 조기강판을 당했다고도 한다. 서로 음주등판을 자주 했다. 그러나 상대편인 선동열에 대한 증언은 9이닝 완봉승을 거뒀다. 딱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일단 당시 신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1987년 9월 2일 경기에서만 놓고 보면 정삼흠이 5실점을 당했다.] 1988년 시즌 종료 후 새로 취임한 [[배성서]] 감독이 강압적인 [[스파르타]] 훈련을 강행하자[* 참고로 [[배성서]] 감독은 [[이현세]]의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에 나오는 캐릭터인 [[손병호]] 감독의 실제 모델이다.] 이에 반발해서 '''여기가 [[공산당]]입니까?'''라는 공개 발언으로 [[항명]]하기도 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이견이 있는데, [[김재박]], [[이광은]], [[신언호]] 등 고참 선수들이 배성서 감독의 강압적인 훈련을 꺼렸고, 당시 주장이던 김재박은 배성서가 자신의 [[영남대학교 야구부|영남대]] 시절 스승이었기 때문에 직접 나설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서 신진급인 만만한 정삼흠을 사주하여 항명 사태를 일으켰다는 루머도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됐던 것은 '공산당'이라는 단어 선택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평안북도]] 출신의 배성서는 [[조선로동당|진짜 공산당]]이 싫어서 남쪽으로 내려온 인물이다. 더구나 공산당 발언이 등장했던 1980년대 말은 여전히 [[레드 컴플렉스]]가 상당했던 시절이다. 그런 시기에 공산당을 혐오하는 사람에게 공산당 당수로 비유했으니 배성서 본인의 기분이 매우 나빴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런 하극상 때문에 1989년은 시즌 후반부가 되어서야 겨우 출장했을 정도로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였다. [[배성서]] 감독은 선수단과의 갈등과 성적 부진으로 시즌 종료 후 [[백인천]]에게 감독직을 넘겼다. 여담으로 1989년 9월 24일 열린 [[해태 타이거즈]]와의 [[동대문야구장|동대문]] [[더블헤더]] 2차전에서 세이브[* 승리투수는 [[김태원(야구선수)|김태원]]]를 거뒀는데, 이 경기는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마지막 [[한국프로야구]] 경기였다. 따라서 정삼흠이 동대문야구장에서의 마지막 KBO 세이브 투수가 된 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