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삼흠 (문단 편집) === [[LG 트윈스]] 시절 === [[파일:1990년 한국시리즈 우승의 순간.jpg|width=300]] 1990년 [[MBC 청룡]]을 인수한 럭키금성은 팀을 "[[LG 트윈스]]"로 바꾸었고, [[백인천]]이 선수들의 지지를 받으며 첫 감독이 되었다. [[백인천]]은 정삼흠에게 고정 [[마무리 투수]] 자리를 주었고, 8승 23세이브를 거두며 기대에 보답했다. 그리고 첫 [[1990년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에서도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2차전(연장 끝에 10회말 밀어내기 승리)을 제외한 나머지 3경기에서 [[마무리 투수]]로 등판했다.[* 한국시리즈 1차전은 팀이 크게 이기고 있는 상황에 경기 감각을 익히는 차원에서 등판한 것이다.] 마지막 4차전에서 삼성의 마지막 타자를 삼진으로 잡고 우승의 순간을 마운드에서 함께 했던 것도 정삼흠이었다. [[파일:LG4인방.jpg]] 왼쪽부터 정삼흠, [[노찬엽]], [[김용수]], [[김상훈(1960)|김상훈]] 그 후 1991년부터 1994년까지 4년 연속으로 두자릿수 승수를 거두며 선발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했다. 1995년 163이닝에 8승 9패, 3.81의 ERA로 스탯이 하락했다. 전반기에는 다소 부진하다가 후반기에 페이스가 돌아왔지만 유독 그가 나오는 날에 득점지원이 적었다.[* 후반기에는 이광환 감독의 3일 휴식 4인 선발 등판 간격이라는 무리한 운영도 원인이었다.] 롯데와의 플레이오프에서 LG는 2승4패로 탈락했지만 그래도 그가 선발등판한 2경기에서는 모두 이겼다.[* 이상훈이 나온 2경기에서 패배한 것이 탈락의 원인이었다.][* 이상훈이 나온 경기도 이겼으면 한국시리즈에 올라갔고 우승했을지도 모른다.] 1996년 4월 28일 광주 해태전에서는 통산 6번째로 100승을 달성했다. 이상훈이 척추분리증으로 이탈하고 김기범이 부진에 빠진 가운데 1선발 역할을 하며 김태원과 함께 무너진 선발진을 이끌었다. 올스타 브레이크 전 전반기 8승5패를 올리며 1선발 역할을 충실하게 했지만 후반기에는 승리 없이 3패만을 떠안았고 그 해를 끝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한다.[* 커리어 마지막 경기에서 자신의 최다패 기록을 경신한다.][* 현역 마지막 승리경기는 1996년 7월 14일 잠실 해태전으로 해태의 에이스 [[이대진]]을 상대로 승리투수가 됐다.] 후문으로는 사실 2-3년 더 뛸수 있었는데, 이후의 감독직을 노리고 코치경력을 쌓기 위해 일찍 은퇴했다고 한다. 코치를 거부하고 현역을 연장하려던 [[김용수]]와는 대조적인 부분이다. 통산 성적은 12시즌 106승 121패 47세이브 1,894.2이닝 ERA 3.62 50완투 11완봉승. 노송 김용수가 워낙 대단해서 그렇지 정삼흠도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맹활약했고 2번의 우승을 견인한 핵심 멤버였다. LG 최전성기의 대표 투수진이었던 김용수, 이상훈, 김태원, 정삼흠 4인방[* 90년에는 김기범이 힘을 보탰고, 94년 우승에는 인현배가 있었다. 다만 위의 네명은 확고부동한 에이스 급들.] 중 한 명. 특이한 점으로 포스트시즌이나 잠실 라이벌 OB, 당대 최강팀 해태에게 강했던 빅 게임 피쳐지만 이상하게도 태평양, 쌍방울, 빙그레 등 약팀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패전이 많았다. 다만 LG의 마지막 우승 시즌인 1994년에는 태평양을 상대로 정규시즌 4경기 4완투승(1완봉), 한국시리즈 포함 5완투(2완봉)을 기록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