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샤오쉬 (문단 편집) === 청나라 소조정을 섬기다 === 그러다가 1923년, 동향사람 진보침의 소개로 처음으로 선통제를 알현하였다. 선통제는 정샤오쉬의 인격에 감명을 받아 스승이 되어주길 청했고 이후 선통제의 교육을 맡았다. 선통제의 서양인 사부였던 [[레지널드 존스턴]]과도 친하게 지냈다. 선통제가 레지널드 존스턴에게 정샤오쉬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레지널드는 중국에서 생활한 25년 동안 정샤오쉬만큼 존경스럽고 칭찬하고 싶은 중국인이 없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1924년, 선통제는 [[청나라 소조정]] 내무부 개혁을 실시하면서 정샤오쉬에게 내무부 총관직을 제의하였고 이로 인하여 정샤오쉬는 청나라 건국 이래로 첫번째 한족 내무부 수장이 되었다. 이에 만청의 왕공들이 즉시 사임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했으나 정샤오쉬는 협박편지를 찢으면서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에 만청 왕공들은 정샤오쉬가 [[자금성]]의 보물을 빼돌리기 위해 내무부 총관이 된 것이라고 [[북양정부]]에 음해를 하였으나 정샤오쉬가 평소에 부귀를 하찮게 여기는 삶을 살아서 명성이 높았기 때문에 북양정부는 이를 무시했다. 이후 정샤오쉬는 내무부 총관으로 재임하면서 자금성의 경비를 대대적으로 감축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타고르]]와 선통제의 만남을 수행했으며 자금성의 수입을 획기적으로 증대시키기 위한 계획을 작성했으나 [[북경정변]]이 일어난 후 [[핍궁사건]]으로 자금성에서 쫓겨나면서 허사가 되었다. 핍궁사건 후 선통제를 계속 모셨다. 1927년 8월, 일본을 방문하여 [[고노에 후미마로]], [[우가키 가즈시게]], [[요나이 미쓰마사]], [[스즈키 간타로]], [[미나미 지로]], [[히라누마 기이치로]], [[기요우라 게이고]] 등 일본의 거물 정치가들을 만나 푸이의 복벽을 논의했다. 1929년에는 [[고모토 다이사쿠]], [[고이소 구니아키]] 등과 논의하여 만주에서 복벽을 행할 음모를 꾸몄다. 고모토는 뤼순에서 이타가키 세이시로, [[이시와라 간지]] 등과 논의하여 정샤오쉬와 접촉한 후 "얼굴은 마련된 것 같군요."라고 만족을 표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샤오쉬는 톈진 거주 시기 푸이가 만주로 떠나는 것은 반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