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샤오쉬 (문단 편집) === 만주국 초대 국무총리 === >"인류는 필히 도덕을 중히 여겨야 한다. 그러나 종족 간에 견해 차이가 있어 남을 억누르고 자기를 드높이려 하니 이에 도덕이 타락해진다. 인류는 필히 인애를 중히 여겨야 한다. 그러나 국제 간에 분쟁이 있어 남에게 해를 끼치고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니 이에 인애가 박하여졌다. 오늘 우리나라를 세움에 있어, 도덕과 인애를 주로 하여 종족 간의 마찰과 국제 간의 분쟁을 해소하여 왕도낙토를 이루고자 하니 마땅히 이를 실행할 것이라. 무릇 모든 국민은 이를 위해 힘쓸지어다." >---- >정샤오쉬의 취임 연설. 국무총리 취임 후 미병설을 주장하며 [[왕도]]정치에는 [[군대 미보유국|군대가 필요하지 않으니 만주국의 치안은 경찰로만 유지]]하고 [[만주군]]은 창설하면 안된다는 입장을 보이고 [[교육]] 중시론을 내세우는 등 만주국 건국 초기 이상주의자들의 구상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1932년 7월 만주국 협화회가 조직되면서 만주국 협회회장에 추대되었다. 이후 총무장관 고마이 도쿠조와의 알력 끝에 10월에 그를 몰아내고 만주국에서 출국시키는데 성공했다. 1932년 6월 14일, 일본 중의원 본회의가 만주국 승인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하면서 8월 19일, 일만의정서가 결정되었고 신임 관동군 사령관 겸 주 만주국 일본 특명전권대사 [[무토 노부요시]]가 만주국에 부임했다. 무토는 정샤오쉬와 회담하여 철도, 항만, 수로, 항공로 등의 관리를 관동군에게 위탁할 것, 일만합작의 항공회사를 설립할 것, 광업권을 일본 내지 일만 합병회사에 허여할 것을 합의하였다. 9월 15일, 일만의정서가 체결될 때, 언론에는 정샤오쉬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고 보도했지만 정작 무토의 수행원인 요네자와 기쿠지 일등서기관은 정샤오쉬가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하고 울 것 같은 얼굴로 우물쭈물하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하타 슌로쿠]]의 일기에도 정샤오쉬는 7월 10일, 갑자기 국무총리 사직 의사를 표명하였으나 일본 측의 만류로 그만두었다고 하는 등 정샤오쉬는 만주국이 일본의 괴뢰국이 되는데에 상당한 괴로움을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 일만의정서 체결 직전인 9월 9일에도 사의를 표명하여 일본 측이 정샤오쉬와 사이가 좋지 않은 고마이를 쫓아내주겠다고 약속해서 겨우 달랠 수 있었다. 조인식에서도 정샤오쉬가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본 일본 측이 갑자기 정샤오쉬가 일만의정서 조인을 거부할까봐 걱정돼서 날짜 기입조차 하지 않고 허겁지겁 서명을 시켰다. 결국 일만의정서 체결 이후에는 [[푸이]]와의 관계도 매우 나빠져서 푸이는 정샤오쉬 경질을 논하게 된다. 하지만 정샤오쉬는 국민정부에 반역자로 지정된 상태라서 중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정샤오쉬는 국제연맹에서 파견한 [[리턴 조사단]]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리턴 조사단이 만주국의 독립성을 인정하여 국제적인 공조를 통해 만주에서 제국을 건국할 희망을 품었지만, 리턴 조사단은 만주국이 일본의 괴뢰국임을 당연히 알아채고 건국 당위성을 부정했다. 이에 일본은 1933년 [[열하사변]]을 일으켰고 급기야 [[국제연맹]]도 탈퇴한다. 만주국 국정도 일본인들이 장악한 총무청이 다 해먹는 꼴을 본 정샤오쉬는 날이 갈수록 의기소침해져 국무회의에도 [[침묵]]을 지키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묵언 시위로 일본인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8시에 출근하고 4시에 퇴근하고 꼼꼼하게 근무일지를 작성하는 근면한 삶을 유지하였다고 한다. 1934년 3월 1일, 일본을 조르고 졸라서 마침내 만주국을 집정제에서 제정으로 바꾸고 자신은 국무총리에서 총리대신으로 거듭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