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샤오쉬 (문단 편집) === 경질 === 정샤오쉬의 고민은 괴뢰국의 총리라는 것도 있고 왕도정치를 행한다는 이상을 펼 수 없다는 것도 있었지만 정작 자신을 내세운 일본인들로부터도 매국노로 욕을 먹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본 중의원 [[오자키 유키오]]는 [[5.15 사건]] 이후 1933년 <묘비를 대신하여>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정샤오쉬를 사리사욕을 위해 나라를 판 불량한 매국노로 비난했다. 평소에도 "한 사람도 나를 따라오는 자가 없고 감화의 힘도 없다."고 자괴감을 표출하던 정샤오쉬는 큰 충격을 받았다. 성질 같아선 진작에 총리직을 때려쳤겠지만 청나라 복벽이 가능할 것이라는 마지막 희망 때문이었는데 만주국 건국 1주년 기념식에서 정샤오쉬가 그간 참고 참았던 분노가 폭발하게 된다. 정샤오쉬는 만주국을 스위스같은 영세 중립국으로 삼고, 황제의 권력을 강화할 것을 요구했으나 일본군은 이를 모두 묵살했다. 결국 정샤오쉬는 기념식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만주국은 안겨 있는 어린애와 같다. 지금 손을 놓아 이것을 걷도록 해야 한다. (...) 그러나 아이를 안은 자, 만약 오로지 오랫동안 이것을 수중에 품어두고 있으면 자립의 날은 없다. (...) 이에 이르러 우리 만주국이 아직 잘 서지도 못하는 상황, 일본 정부가 기어이 손을 놓아 서도록 하지 않는 상황, 이것이 오늘날 명백한 바이다." 발언을 마친 정샤오쉬는 "용렬무능"이라고 스스로를 비판하고 퇴장했다. 관동군은 격노하여 정샤오쉬를 탄핵했고 푸이는 "마음 속의 불만을 드러내는 것은 총리 대신으로 아주 신중하지 못한 행동이다. (...) 총리으로서의 수완과 태도에 결여된 바가 있다."고 비판했다. 어차피 정샤오쉬도 1935년 일본을 방문하여 [[쇼와 덴노]]에게 온갖 아첨을 하고 있는 푸이를 보고 정나미가 다 떨어진 상태였고 '즐겁도다, 옥두를 내던진 것과 같다.'라는 시를 지으며 기뻐했다. 이는 [[범증]]이 [[항우]]와 연을 끊은 후 옥두를 바닥에 던져 울분을 푼 일화를 인용한 것이기 때문에 주변의 비난을 샀다. 1935년 5월, 정샤오쉬는 푸이가 일본으로 간 사이에 관동군 사령관 [[미나미 지로]]와 내각 개조에 대해 2차례 논의했다. 정샤오쉬는 푸이가 사임을 승인하자 미나미 지로에게 자신의 후임으로 젠다오 성장 [[차이윈성]]을 추천했다. 하지만 일본 측은 조종하기 쉬운 참의부 의장 --하오하오 선생-- [[장징후이]]를 지명하였다. 5월에 대대적인 인사 교체가 행해지면서 정샤오쉬는 총리직에서 완전히 퇴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