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성공 (문단 편집) === 반청복명 운동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oxinga_territory.jpg|width=530&align=center]]|| || 정성공의 세력 범위[br]빨강색: 정성공의 직할령. 주황색: 정성공의 영향권. || [[1644년]] 농민 반란인 [[이자성의 난]]으로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군의 공격이 거세지자 정성공은 아버지 정지룡과 함께 당왕(唐王) 주율건(朱聿鍵)을 [[남명]]의 제2대 황제인 [[융무제]](隆武帝)로 옹립하여 청나라의 남정군에 대항했다. 비록 [[1647년]](청 순치 4년, 남명 영력 원년)에 정지룡이 청나라에 [[항복]]했지만 정지룡은 아들인 정성공에 대한 회유 공작에 실패하여 참수당했다. 이후 정성공은 아버지의 군사력을 이어받아 [[하문]] 인근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그리고는 무역을 통하여 군비를 충당하는 한편 해징공의 작위와 절강, 복건, [[광동성|광동]] 3성의 [[도독]]을 하사하겠다는 [[청나라]]의 회유를 거부하고 맹공을 퍼부어 [[1659년]](청 순치 15년, 남명 영력 13년)에는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전장 시|진강]]을 비롯한 [[강남(중국)|강남]]의 여러 거점을 점령한 다음에 명나라의 고도인 [[난징|남경]](南京)까지 진격하여 포위하는 기염을 토했다. 애초에 아버지 정지룡이 회유에 이끌려 투항한 후 압송되었기 때문에 정성공에게 있어 청나라에 대한 항복은 선택지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 정성공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대한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제해권을 활용해 상업 루트를 관리하며 자신의 왕국을 건립했다. 그는 동•서양을 연결하는 무역 네트워크에서 거액의 이윤을 거둬들여 부흥군을 부양하고 무기를 구매했다. 이듬해(1660. 청 순치 16년, 남명 영력 14년)에는 '''샤먼 전투'''를 지휘해 청나라의 수군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그러자 청나라는 산둥에서 광둥에 이르는 동쪽 연해의 주민을 내륙으로 강제 이주시켜 정씨의 명나라 부흥군이 연해 주민들과 보급 또는 통상을 할 수 없도록 청야작전을 실시했다.('''천계령''') 정성공이 육상기지를 상실하자 그의 무역 네트워크는 곧 기반을 잃게 되었다. 또한 정성공은 기회주의적인 명나라 출신 항장들의 계략에 넘어갔고, 부흥군 병사들의 군기를 어설프게 잡았다. 즉, '''농민들에게 민폐를 끼치면 닥치고 사형'''급으로 엄하게 군기를 잡았는데, 잘 나갈 때야 이렇게 군기를 잡아도 별 문제가 없었지만, 점점 전황이 악화되면서 이런 군기잡기로 인한 불만이 폭발하게 되었다. 정성공은 반청복명을 위해서 본토의 민심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기에 계속 군기를 엄하게 잡으려고 했지만, 그 부하들 몇몇이 당면한 휘하 병사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약탈]]을 허용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상황은 개판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이에 군중의 불만을 사게 되어 반란 사태가 일어나는 통에 곧 청군에 패배하게 되었고, 진강을 비롯한 주요 점령지를 모두 버린채 복건성 해안가의 근거지인 [[금문도]]로 밀려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