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성왕후 (문단 편집) === 왕비 시절 === [[1737년]](영조 13년) 3월 10일 <[[승정원일기]]> 기사에서는 [[신하]]들이 "중궁전에 들어가는 진상품보다 [[효순왕후|현빈궁]][* [[효장세자]]의 [[세자빈]]인 [[효순왕후|현빈 조씨]]의 거처다.]에 들어가는 진상품이 많아 중궁전의 체면이 맞지 않으니 진상품을 늘리자"고 하자 "[[효순왕후|현빈궁]]에 기거하는 나인이 많아 그런거"라며 거부하고 "중궁전에 들어가는 약에 대한 표지를 내리는게 매번 늦어 중궁전으로 들어가는 약이 들어가는 것이 매번 늦어진다"고 하자 "도제조가 [[대구 서씨|서씨 일가]]의 서명균인데 설마 늦겠냐"며 "이미 이전에 서명균에게 중궁전의 약은 그들 집안일이니 알아서 하라고 지시한 적이 있다"고 변명했다. 신료들은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없는데요? 뭐 확인해보겠습니다."라는 반응이었다. 두 부부 사이가 최악인 건 [[궁궐]] 내에서도 공공연한 일이었는지 정성왕후는 [[사망|승하]]하기 14년 전인 [[1743년]](영조 19년)부터 [[영조]]에게 통증을 [[호소]]했으나 [[영조]]는 오히려 "[[담석|담증]] 가지고 [[꾀병|엄살]] 부린다"고 말을 씹어버렸던 것이다. 심지어 그녀의 용태(병의 증상)를 진찰한 의관도 애초에 "[[영조]]가 자기 마누라 얘기라면 들은 척도 안할 것"이니 [[영조]]를 모시는 [[환관|내시]]에게 대신 보고할 정도였다.[* 한마디로 당시 공직에 있던 사람들은 어지간하면 영조의 부부관계가 파탄났다는 걸 다들 알았다는 뜻이다.] [[1752년]](영조 28년) 11월 23일에는 "중전의 [[회갑]]인데 하례를 드리게 하자"는 [[우의정]] [[김상로]]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사도세자]]에게 "네 엄마[* 사도세자를 직접 낳은 생모는 [[영빈 이씨]]지만, 왕의 자녀는 모두 공식적으로 왕비의 자녀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된다.]의 [[회갑]]이랍시고 잔치까지 크게 벌일 것이 있느냐"는 내용의 글을 써서 보내는 일도 있었다. >'''우의정 김상로가 중궁전의 회갑에 하례를 드릴 것을 청하였는데 허락하지 않다''' >---- >[[영조|임금]]이 대신과 예조의 당상을 소견하였다. 우의정 '''김상로'''가 중궁전의 [[회갑]]에 하례를 드릴 것을 극력 청하였는데, [[영조|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청을 따르지 않는다는 뜻으로 글을 지어 춘방관(春坊官)으로 하여금 [[사도세자|세자]]에게 가서 전하도록 하였다. >문학 '''박사눌(朴思訥)'''이 가서 고한 뒤에 또 청대하니, 임금이 불러 물었다. '''박사눌'''이 말하기를, >>"[[사도세자|동궁]]이 이 하교를 받고 매우 [[실망]]하며 말하기를, 내가 평소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고는 이어 잠자리에 들지 않고 앉아 있습니다." >하니, [[영조|임금]]이 말하기를, >>"지나치구나." >하였다. >---- >- '''《[[영조실록]]》 78권, 영조 28년([[1752년]], 청 건륭(乾隆) 17년) 11월 23일 (경진) 1번째기사.''' 그로부터 15일 후 [[영조]]는 [[양위]] 파동을 벌여 [[홍역]]을 앓다 나은 지 1달밖에 안 됐던 병약한 [[사도세자]]를 눈 밭에서 양위를 한다는 전교를 거두어 달라게끔 [[석고대죄]] 제대로 시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