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성왕후 (문단 편집) === 사망 후 === [[1757년]](영조 33년), [[사망|승하]] 직전이나 당시, 《[[영조실록]]》과 《[[한중록]]》에 따르면 심하게 [[각혈]]을 하고 팔다리가 심히 부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현대로 치면 [[위궤양]]에 [[부정맥]]이 겹쳐서 세상을 떠난 걸로 보이는데 당시 남편 [[영조]]의 태도가 그야말로 [[막장]]이다. >'''중궁이 피를 토하여 약방에서 주원에 옮겨 직숙하다''' >---- >중궁전(中宮殿)이 편찮은 까닭에 약방에서 주원(廚院, [[사옹원]])에 옮겨 직숙하였다. >당시 곤전(坤殿)이 [[각혈|피를 토한 것]]으로 인하여 원기(元氣, 심신의 활동력)가 갑자기 가라앉았는데, >연달아 삼다(蔘茶, 인삼차)를 올렸지만 조금의 동정(動靜)이 없었으므로, 상하(上下)가 허둥지둥 어쩔 줄을 몰라 하였다. >---- >- '''《[[영조실록]]》 89권, 영조 33년([[1757년]], 청 건륭(乾隆) 22년) 2월 14일 (병자) 1번째기사''' [[영조]]는 죽은 마누라의 빈소를 지킬 생각은 안 하고 우연히 같은 날 [[사망]]한 사위 정치달([[화완옹주]]의 남편)의 문상을 갔다. 이는 궁중 예법에도 어긋나고 [[인간]]적으로도 너무 지나친 처사라 대신들과 대간이 경악하여 심하게 반대했지만 [[영조]]는 반대하는 대간들을 모조리 체차(遞差)[* 관리의 임기가 차거나 부적당할 때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일.]해버리면서까지 인정머리 없이 강행했다. >'''일성위 정치달이 졸하자 곡반을 하고, 이를 만류한 삼사 신하를 체차시키다''' >---- >이날 '''일성위(日城尉) 정치달(鄭致達, [[화완옹주]]의 남편)'''이 [[사망|졸]](卒)하였다. [[예조|예단]](禮單)이 먼저 들어오고 조금 있다가 중궁전(中宮殿)이 [[죽음|승하]]하였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장차 곡반(哭班)에 나가려 하는데, 갑자기 좌의정과 우의정을 입시하도록 명하여 >(중략) >>"이렇게 망극(罔極)한 시기를 당하여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망극한 일을 하시려 합니까?" >하니, [[영조|임금]]이 잇달아 엄중한 하교를 내렸으나, '''이최중(李最中)'''이 눈물을 흘리며 더욱 힘껏 간쟁하였다. >[[영조|임금]]이 진노(震怒)하여 '''이최중'''에게 물러나도록 명하였는데, '''이최중'''이 말하기를, >>"신은 청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면 감히 물러날 수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이최중'''의 직임을 체차하도록 명하고, 인해서 합문(閤門)을 닫고 마침내 보련(步輦)으로 '''연영문(延英門)'''을 나갔다. >대간(臺諫)과 옥당(玉堂)에서 앞으로 나와 다투어 고집하자, 임금이 또 모두 체임하도록 명하였다. >대사간 '''이득종(李得宗)'''이 말하기를, >>"신의 관직을 체임하더라도 전하의 이번 행차는 결단코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영조|임금]]이 삼사의 신하를 '''중도 부처(中途付處, 유배 죄인의 평소 공로 등으로 정상 참작하여 중간 지점에 한 곳을 지정하여 머물러 있게 하는 유배형)''' 하도록 명하였다가, 조금 뒤에 단지 '''체차(遞差)'''하도록 명하였다.(중략) >---- >- '''《[[영조실록]]》 89권, 영조 33년([[1757년]], 청 건륭(乾隆) 22년) 2월 15일 (정축) 3번째기사.''' 이후 불과 한 달 후인 3월 26일, 대왕대비 [[인원왕후]]마저 [[죽음|승하]]하면서 일종의 완충장치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이는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 '''그런 후 [[조선]]사에 [[임오화변|듣지도 보지도 못한 비극적 스캔들 사건]]이 일어난다....''' 죽은 후에도 같은 곳에 묻히지 않고 [[한성부|한양]]을 기준으로 서로 정반대 지역에 묻힌 건 [[영조]]의 뜻이 아니라 [[정조(조선)|정조]]가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를 배려한 탓이었다.[* 과거 [[문정왕후]]도 "[[중종(조선)|중종]]이 [[장경왕후]]랑 묻힌 꼴은 못 보겠다"고 이장을 했으나 비만 오면 물에 잠기는 곳이라 무산되었다. [[문정왕후]]나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나 [[중종(조선)|남]][[영조|편]]에 대한 정은 있었던 모양.] [[영조]]는 아내를 떠나보낸 후 --워낙 변덕이 심한 분이라-- 뒤늦게나마 미안했는지 친히 행장까지 쓰고 오히려 정성왕후 옆에 묻히려고 빈 자리를 마련했다. [[정조(조선)|정조]]는 지금의 [[동구릉|원릉]] 자리에 [[영조]]를 장사지냈는데 이 자리는 원래 [[효종(조선)|효종]]이 매장되었다가 비가 샐 우려가 있다 해서 천장된 흉지이자 파묘 자리였으며 석물이 해를 거르지 않고 기우는 등 최악에 가까운 자리였다. 더군다나 "[[경종(조선)|경종]]을 여기에 장사지내자"는 신하들의 주청에 [[영조]]는 "[[장례식|국장]]에 어떻게 파묘 자리를 쓰겠느냐"고 물리쳤던 적도 있었다. [[정조(조선)|손자]]에 의해 민간에서도 묏자리로 기피하는 파묘 자리에 잠든 것. 물론 이것만으로 손자인 [[정조(조선)|정조]]가 할아버지 [[영조]]에게 불효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할아버지인 [[영조]]에 대한 효성 하나는 지극했다. 나중에 "[[경종(조선)|경종]]에게 신하 노릇하기 싫었다"는 신하를 보며 "우리 할아버지([[영조]])가 형님 되시는 [[경종(조선)|경종 대왕]]께 한 우애가 얼만지 아느냐"며 더욱 분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