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세균/생애 (문단 편집) == 출생 및 성장 == 1950년 11월 5일 [[전라북도]] [[진안군]] 동향면 능금리 능길마을의 빈농가에서 아버지 정병남(丁炳南, 1925. 8. 17 ~ 1993. 12. 5)과 어머니 [[청주 한씨|금산 한씨]](錦山 韓氏) 한순배(韓順培, 1924. 8. 26 ~ 2004. 1. 16)[* 한혁기(韓爀基)의 딸이다.] 사이의 4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검정고시]]로 중학교 과정을 수료했다. 처음엔 [[전주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으나, 4년제 대학에 진학하고자 결심하고 [[전주신흥고등학교]]로 [[전학#s-1|전학]]을 갔다. 이때 일화가 하나 있는데, 신흥고 교장에게 [[대학]]은 가고 싶은데 돈이 없으니 대신 본인을 장학생으로 입학시켜달라는 배포 큰 편지를 보낸 것. 하지만 현실은 동화가 아니라서 교장은 장학생 대신 [[매점]] 일을 맡겼고, 그 알바[* 매점에서 빵을 파는 '빵돌이'로 3년 내내 [[근로장학생]]으로 전액 장학금을 받았고, 학생회장을 지냈다. 전주신흥고 69회 졸업생이다.]로 돈을 벌면서 공부를 해 [[고려대학교/학부/법과대학|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했다는 이야기가 방송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리고 고려대 재학 당시엔 [[고대신문]] [[기자]], [[총학생회]]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1978년, [[쌍용그룹]]에 입사했다. [[미국]]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에서 주재원으로 일했다. 이후 1990년대에는 [[상무이사]]로 승진해서 [[수출]] 업무를 맡았다.[* 앞에서 서술했다시피, 이런 경험 덕분에 정세균은 [[이명박]], [[이상득]]과 어느 정도 친분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샐러리맨|커리어 유형이 일정부분 이상득 및 이명박과 겹치는 점]]을 생각하면 영남이 고향인 이들과 달리 호남이 고향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성격상 이들과 통하는 부분이 꽤 있었을 것이다.][* 이명박과 이상득은 형제임에도 정치 입문 과정이 다르다. 이상득은 본래 육사 14기로 입학했으나 건강 문제 때문에 1년만에 자퇴를 한 이력이 있다. 그래서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재임하고 있었던 시절에 이미 민정당 정치인들과 가깝게 친분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이춘구]]와 친구였던 덕분에 그 추천으로 민정당에 입당했는데, 1988년에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직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13대 총선]]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고향 [[포항시]]에 출마하여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이명박은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14대 대선]]을 앞두고 전설의 재벌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대통령을 노리고 [[통일국민당]]을 창당하면서 정주영이 영입한 정치인들이 [[제14대 국회의원 선거|14대 총선]]에서 선전한 것 때문에 위기 의식을 느낀 [[김영삼]]이 정주영에 맞서기 위한 현대 고위직 출신 인사로 [[민주자유당]]에 영입한 것이므로 두 형제가 이후에 소속한 당 자체가 같았어도 이상득은 군부 인맥으로 시작된 정치로 [[3당 합당]] 이전 전두환 - 노태우 시절의 정통 군부 민정당 라인, 이명박은 3당 합당 이후 경제 인맥으로 들어온 [[김영삼]] 영입 라인이라는 큰 차이가 있다.] 그동안 미국 [[페퍼다인 대학교]]에서 [[경영학]] 석사를 따 실물과 이론을 두루 갖추게 되었다. 1995년에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김대중]]의 제안을 받고 정치에 입문했다. 1996년 고향인 [[진안군]], [[무주군]], [[장수군]]에서 제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18대 국회까지 그 한 [[지역구]]에서만 내리 4선을 역임하면서 2003년에는 열린우리당 정책위의장, 2004년에는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장[* 이 당시 경합했던 사람이 정동영계였던 [[김한길]]인데 정세균이 예결위원장, 김한길이 건설교통위원장직을 맡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다.], 2005년에는 [[열린우리당]] 원내대표(국회운영위원장 겸임)와 당 의장 대행, 2006년에는 [[산업통상자원부장관|산업자원부장관]], 2007년에는 열린우리당 의장(2기)을 맡기도 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텃밭(정치)|쉽게 당선될 수 있는]] 자신의 지역구에 불출마를 선언한 뒤 [[서울특별시]] [[종로구(선거구)|종로구]]로 지역구를 옮길 것을 선언한 뒤 출마하였고, [[새누리당]] [[홍사덕]] 후보를 제치고 당선되었다.[* 당시 새누리당 현직 의원은 [[박진]](3선)이었는데 박연차 게이트에 연관된 인물이어서 스스로 지역구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래서 [[이동관]] 전 홍보수석과 [[조윤선]] 비례대표 의원이 종로구 출마를 선언한 상황이었는데, [[민주통합당]]이 [[정세균]] 전 대표를 공천해버리자 [[새누리당]]도 맞불 작전으로 당에게 자신의 거취를 위임한 친박계 6선 중진인 [[홍사덕]] 전 원내대표를 데려와서 공천을 준 것이다.] 그리고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대권주자로 거론되던 前 서울시장 출신의 [[오세훈]] 후보를 제치고 종로구에서 [[재선#s-1|재선]]하였다.[* 이 선거에서의 당선까지 모두 합치면 총 6선이다.] 그 동안 여의도 안팎에서 [[정세균]]의 선거전 역량에 의문을 품었던 사람들도 보수계의 거물급 정치인을 두 번이나 압살하는 것을 보고 의심을 모두 버렸다고... 더불어민주당의 원내1당 등극과, 여야 두루 적을 만들지 않는 스타일 덕에 20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으로 여유롭게 선출되었다. 당시 당 내의 경쟁 상대는 [[문희상]]이었다.[* 당시 문희상은 당내 공천위원회 기준 의정 활동 점수 미달로 공천 컷오프를 당했다가, 후보최종결정 직전에 전략공천으로 들어간 것이라서 제대로 면이 서지 않아 불리했던 부분도 있다. 물론 이후로는 정세균의 후임으로 20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을 역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