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세운(고려) (문단 편집) === 초기 행적 === 정세운은 광주 장택현(長澤縣) 사람으로 일찍이 공민왕을 따라서 [[원나라]]에 들어가 숙위했으며 [[벼슬]]을 거듭하여 대호군이 되었다. 공민왕이 즉위한 후 1등 [[공신]]이 되었고 [[김용(고려)|김용]]과 함께 왕의 총애를 받았다. 이후 정세운은 장사성 [[토벌]]에 가담하라는 원나라 [[혜종(원)|순제]]의 뜻에 따른 공민왕의 지시에 따라 [[유탁]], 염제신, [[권겸]], 원호, 나영걸, [[인당]], 김용, 이권, 강윤충, 황상, [[최영]], 최운기, [[이방실]], [[안우]], 최원 등 40여 명과 [[평양시|서경]] 수군 300명, 날쌔고 용맹한 군사를 모집해 공민왕 3년(1354년) 8월 10일 [[베이징]]으로 가서 [[장사성]] 토벌전에 가담했다.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 김남득이 홀적(忽赤) 중랑장 정곡에게 매를 쳐서 욕보이자 정곡의 동료인 권석화 등이 공민왕에게 호소했다. 정세운과 김용은 김남득과 친했으므로 이를 괘씸히 여겨 공민왕에게 부탁해 권석화 등에게 매를 치고 해도(海島)로 [[유배]]보냈다. 공민왕이 밀직부사 임군보를 총애하자 정세운은 김용과 함께 이를 시기하여 [[모함]]한 끝에 공민왕 4년(1355년) 10월 임군보가 왕지를 거짓으로 전했다는 이유로 [[제주도|제주]]로 유배보내는데 성공했다. 공민왕은 김용, 홍의, 정세운, 유숙 등에게 매일 [[궁]]에 들어와서 크고 작은 것을 가리지 않고 일체의 일을 아뢰도록 했다. 정세운을 지문하사에 임명했으며 김용을 중서시랑 문하평장사로 유숙을 동지추밀원사 상의회의도감사로 삼아 국정을 장악하게 했다. 이후 정세운은 참지정사 경천흥, 유숙 등과 함께 "사방에서 [[군대]]가 일어나 [[백성]]들이 상처받고 굶주리고 있으니 지금 성을 쌓는다면 백성들이 장차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진언해 성을 쌓는걸 중단하게 했다. 공민왕 5년(1356년) 그동안 [[기황후]]를 등에 업고 전횡을 일삼던 [[기철]] [[병신정변|일당이 주살]]되었으며 공민왕은 기철 일당 토벌에 큰 공을 세운 이들을 공신으로 삼았는데 정세운은 1등 공신으로 책록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