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신병원 (문단 편집) == 역사 == 유럽에서 그리스-로마 시대에도 우울증, 사회공포증, 성격장애 등 현대 질환들의 기초를 찾을 수 있는 문헌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당연히 그 시대에도 정신질환자는 존재했었고, 이들에 대한 인식과 태도는 당연히 적대적이었다.[* 말이 안 통하고, 이해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감정 반응이고, 정신질환자는 두려움과 감금의 대상이었다.] 감금과 사회로부터의 격리가 정신질환자를 대하는 일반적인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일부 환각, 환청 같은 것들은 종교적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심한 경우는 유럽에서 그리스도교가 장악했던 중세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정신질환자는 그냥 [[악마]]가 [[빙의]]한 이들로 통일되었고 이 때문에 인권은커녕 [[마녀]]로 몰린 이들과 함께 화형당하기 십상이었다. 그나마 고대로부터 의료기술을 고스란히 전수받은 유럽 최고의 의료진들이 있던 [[콘스탄티노플]]에 가면 이야기가 다르긴 했는데, 거긴 일단 '[[동로마 제국|로마]]' 라서 사정이 다르다.[* 여러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온건한 치료기록이 남아있다. 그런데 동로마는 이미 골수 기독교 제국이고, 따라서 종교의 영향이 막대해서, 정신질환자를 온건히 치료하기는 하는데, '''[[성수(종교)|성수]]'''가 처방에 끼어있었다.] 중세 [[이슬람]]권에선 정신질환자에게 친절히 대하라는 교리에 따라 정신질환에 대한 의식이 비교적 관대했다. 환자에 대한 적극적인 치료 및 정신질환의 원인과 이를 치료하기 위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8세기]]가 되어서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6734707/|이라크 바그다드에 세계 최초의 정신병원이 세워졌고]] 전문적인 음악 치료가 행해졌다. 페르시아(이란) 의사 [[이븐 시나]](980~1036)의 기록에서도 '[[정신질환자]]는 두려워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며, [[구타]]와 [[감금]]은 되려 상태를 악화시킨다. 그리고 [[우울증]]과 [[조울증]] 초기 상태에서 처치를 진행하지 않는다면 [[자살]]이나 [[공황발작|발작]] 같은 말기 증상을 가져온다.' 라고 저술한 바 있다.[* 지금이야 의학이 발달하면서 이 정도는 상식이 되었지만 그 시절에는 획기적인 연구 결과이기도 했다.] 이후 1410년에 스페인의 발렌시아에서 유럽 최초의 정신 병원이 세워졌는데, 이는 정신질환자만 받은 최초의 특수병원이었다.[* 바그다드 정신병원은 다른 환자들도 치료하였기에 특수병원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유럽 기독교 나라들은 이러한 이슬람의 치료법을 [[이교도]]의 치료라고 무시해버렸으며 골때리게도 그 이븐 시나의 책자들을 유럽 의사들이 엄청나게 애독하고 연구하던 걸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이다.[* 16세기 유럽 연금술사이자 의사인 [[파라켈수스]](1494~1541)만 해도 이븐 시나의 의학전범을 높이 평가하면서 [[이교도]]라고 까면서도 "왜 우린 벌써 500년이나 지난 이슬람 의사의 의료 기술을 넘지 못하는 거냐!"라고 [[한탄]]했을 정도였다.] 유럽에서 중세 이후 들어서는 정신병원이 등장하기도 했으나 그저 족쇄를 채워두고 기본적으로 가둬두는 곳이었을 뿐 치료소는 아니었다. 환자를 치료한다는 개념은 전혀 없었고 사회로부터 격리시켜놓는 용도였다. 그리고 돈 몇푼 더 주면 구경, 아니 그것을 넘어서 환자를 때릴 수 있게 했다. 이슬람권 여행자로 16세기에 유럽을 여행한 '알 라흐만 시아드'는 "유럽 기독교인은 정신병자를 패 죽이고 고문하는 걸 즐기는 것 같다."라고 정신병원을 다녀온 체험에 대하여 기록을 남겼을 정도다. 우리나라와 동아시아도 유럽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고, 정신질환자가 있으면 그 가족들은 이를 꽁꽁 감추고 밖에 보이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만 했다. 메이지 유신 때까지 일본에는 '사택감치'라는 제도가 있어서 정신질환자를 위해 집 안에 감옥을 만들고 가족들이 이를 돌보는 것이 법적으로 허용되기도 했다. 유럽에선 계몽주의 시대인 18세기 들어서야 정신병자들에 대한 인식이 점차 개선되었고 정신질환 환자들도 치료받아야 한다는 개념이 생기기 시작했다. 필리프 피넬(Phillipe Pinel)이라는 프랑스 학자는,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에 유행하던 계몽주의 사상 하에 정신질환자에 대한 구타, 감금은 치료적 효과가 없고, 이들은 인간적으로 대해야 할 인권을 가진 존재이자 치료의 대상임을 강하게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많은 사람들이 사회로부터의 격리가 아니라 치료의 장소로서의 정신병원을 만들기 시작했고, 이것이 현대적 정신병원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정신질환자에 대한 효과적인 치료는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고, 그 당시 행해졌던 치료로는 사혈법[* 피 뽑는 것.], 치아 뽑기, [[관장]], 회전의자 돌리기, 구운 쥐를 먹이기, 매 타작 등이 계속 지속되었고, 효과는 당연히 거의 없었다. 이 때문에 20세기 초 [[전두엽 절제술]]이 등장했을 때 이를 창안한 모니츠가 노벨상까지 탈 수 있었던 건 겉보기에 치료 효과가 극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난동 피우고 망상을 호소하던 환자를 차분하게 진정시켜 버렸으니 대단하다고 여겨진 것이다. 문제는 이 효과가 인위적인 뇌 손상으로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이지만.[* 이 시절에는 정신질환이 아니라 일반 질병에도 피 뽑기, 이빨 뽑기, 관장 등등을 하는 게 치료법이라고 여겨졌다.] 조지 워싱턴도 폐렴에 걸렸을 때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과다출혈]]로 세상을 떠났다고 하며 [[루이 14세]]도 이런 치료법을 썼다. 거기에다 19세기 중반부터 후반까지의 미국에서 남자는 [[포경수술]]을 해야 정신질환을 치료하거나 예방할 수 있다는 내용까지 나왔다. 심지어는 20세기 초반에는 [[인슐린]]을 주사해서 인위적인 [[저혈당]] 쇼크 상태를 유발시켜 증상을 진정시키는 위험한 방법까지 치료법이라고 사용되었다. 19세기 후반 프로이트가 등장하면서 정신질환 환자들에 대한 치료 방안이 심리적인 방안으로 개선되기 시작했고, 20세기 2차 세계대전 이후 향정신성약물이 발견되고 활용법이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비인간적이고 잔혹한 치료 방술들은 서서히나마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1960년대 중반 입원 환자들에 대한 지역 사회 복귀 운동을 실시하기 시작했으며, 정신병원을 줄이고 입원 병동을 줄이는 동시에 환자들이 병원 장기 입원이 아닌 정신보건센터를 통해 치료를 받도록 권장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에서는 1945년 개원한 [[청량리정신병원]]이 국내 최초의 정신병원이다. 6.25 전쟁 때 생긴 정신병자들을 많이 수용하였고, 화가 [[이중섭]]이 입원하기도 했다. 2018년 폐업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