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신분석학 (문단 편집) === 현대 심리학과의 관계 === 이는 매우 논쟁적인 사안이며 단정적으로 설명하기 곤란하나, 가능한 한 포괄적으로 설명하자면 임상 및 상담 심리학계를 비롯하여 특정 개인의 생애사를 추적하여 통합적인 조망을 구성해야 하는 '''치료적 맥락'''에서 정신 분석학은 현대에까지도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며 계승되고 있다. 물론 프로이트의 이론이 날것 그대로 숭배되면서 전수된 것은 아니며, 현대에는 非임상 분야들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런 '''다른 심리학 분야들의 관점'''에서 보면 프로이트의 이론은 냉정히 말하면 하나의 폐기 처분된 갈래, 혹은 역사적 의의만을 갖고 있는 한때의 [[인간관]]에 불과하다는 정도의 평가를 받는데, 이 마저도 호의적인 평가에 가깝다. 임상 분야에서 정신 분석학의 가치는 고객의 상태에 대해서 그 출생력, 가족력, 발달력, 사회력, 성격 등과 같은 다양한 데이터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수집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데 있다. 특히 이들 데이터들을 하나의 통합된 형태로 묶어내는 방법으로서 정신 분석학은 대단히 유용하게 간주되고 있다. 과학적 엄밀성이 중요하기는 하더라도 사람을 치료하는 '임상적 [[기술]]'의 관점에서는 그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행동주의 치료]]를 급진적으로 적용하려는 치료사가 아닌 한, 대개의 치료사들은 정신 역동적 접근을 하나의 의미 있는 방법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필요에 따라 적용할 수 있다.[* 대신, 일반적인 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들이 기본적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수준은 정신 역동이론 및 대상관계 이론까지다. 융학파나 라캉학파를 추구하는 것은 개인 선호에 따른 것으로 봐야 한다.] 게다가 스테판 미첼 코슬린에 의하면 "프로이트의 시대에 정신 분석학이란 프로이트 개인의 발명품"이었다. 하지만 프로이트 생전에도 [[빌헬름 라이히]] 같은 몇몇 인물들이 프로이트와 때때로 공개적인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었고, 프로이트 사후 20세기 중반부터는 수많은 이론가들이 경험 과학적인 방법으로 이 이론을 수정하고 다른 심리학, 뇌과학 분야의 성과와 맞물려 발전해 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때문에 현대의 정신 분석학은 전통적인 프로이트 이론과는 많이 다르다.[* 도서 《Freud and Beyond》(1995)를 참고.] 그렇기 때문에 21세기 현대 정신 분석학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은 학문적 여명기에 나왔던 논리만을 가지고 공격당하는 것에 상당히 억울해하고 있는 중. 이들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에 머물러 있지 않고 계보 속에서 계속해서 발달되고 수정된 큰 틀의 정신 분석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큰 틀'을 싸잡아 정신 역동적(psychodynamic) 이해라고 한다. 모든 임상가들은 정신 분석학자가 아니어도, 대상관계 이론처럼 현재까지 발달된 정신 분석적 맥락 안에서 기본적인 틀을 이용하여 환자를 이해하고 치료할 수 있다.] 현대적인 임상 연구 방법론이 정립됨에 따라 프로이트의 전통적인 생각들은 (과학적 맥락이 아닌) 임상적, 치료적 맥락에서 보완되고 수정되어 왔다. 물론 새로운 과학적 방법 역시 정신 분석학계에 영향을 끼쳐 왔고, 이에 전통 프로이트 이론의 많은 부분들이 부정되거나 이를 현대 정신 분석학 이론가들이 수정해 왔다. 한편 비판적인 심리학자들은 프로이트가 '''지나치게 [[과학적 방법]]의 요건을 도외시한 채로 지나치게 포괄적인 이론 체계'''를 세웠다고 비판한다. 프로이트는 심리적 문제를 경험하는 빅토리아 시대 비엔나 지역의 소수 여성 내담자들만을 대상으로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관점을 형성했고, 이를 미국의 임상가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과잉 해석 및 확대 적용을 시도한 것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본다.[* 이 점에 대해서는 프로이트를 비판하는 인접 학문 분야들의 (ex. 페미니즘 이론 등) 저작물들에서 공통적으로 지적되는 부분이다.] 인지 과학자 키스 스타노비치는 《[[심리학의 오해]]》 에서 '인간 그 자체를 설명할 수 있는 포괄적인 설명이 심리학이라는 학문에는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크나큰 착각에 빠져 있는 데에는 정신 분석학의 영향이 크다'고 비판했으며, 상담과 심리 치료를 통해 사람들을 돕는 일은 심리학이라는 학문 그 자체의 존재 이유가 되지도 않는다고 웅변했다. 또한 그 치료의 과정 자체가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에 기초하지 않으면 심리학을 다른 학문들과 구분할 수 있게 하는 정체성 자체를 상실하게 된다고도 하였다. 한편 신경 과학자 크리스 프리스는 정신 분석학에 기초한 논문은 아직 실증되지 않은 아이디어에 그치는 논의들을 참고 문헌으로 다수 인용하고 있다고 자신의 저서에서 언급하였다. 이런 비판론자들은 치료적 맥락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도리어 더더욱 엄밀한 의미에서의 과학성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의 일부는 정신 분석 이론가들의 잘못된 학문적 태도와도 연관이 깊다. 정신 분석학이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이론가의 주류가 정신과 의사들이 되었고, 이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정신 분석학을 지나치게 '''의료화'''(medicalization)하였다는 것이다. 난해한 언어, 이해하기 어려운 임상적 용어들로 다른 학문이 이에 침투하기 어려운 배타적인 이론으로 만들었으며, 이러한 성역화는 정신 분석학이 다른 과학적 발전과는 동떨어진 갈라파고스와도 같은 상황을 만들었다는 비판이 있다. 실제로 1960-70년대 정신 분석학의 저작들을 읽어보면 일반 정신과 의사들이 보기에도 너무 난해하게 쓰여져 있다. 이와 같은 상이한 관점에서 언급할 만한 것은, 결국 [[심리학]]이라고 대중적으로 묶일 만한 학문 분야에서조차 심리학은 결국 그 학문함의 목적성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연구 대상의 보편적 특성이나 패턴을 발견해내는 (즉 nomothetic한) 것과 특정 개인의 심리적 상태를 평가 및 진단하고 개선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즉 idiographic한) 것이 모두 심리학이라는 이름하에 교과목이 편성되어 훈련을 받지만, 결국에는 그 목적성의 차이로 인해 학술 공동체로서의 괴리감을 촉발하게 만든다는 문제가 있다. 한쪽에서는 전공 강의의 첫 수업 시간부터 정신 분석학을 최우선적으로 배우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프로이트에 대한 학문적 [[부관참시]]를 하는 것으로부터 그들의 전공 강의를 개관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심리학의 역사에서 대단히 보편적인 수준에서 제기되어 왔던 것으로, 일례로 APA의 회장을 역임했던 윌리엄 베반은 심지어 "심리학과 회원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심리학과' 라고 적힌 동일한 우편함에서 우편을 받는다는 것뿐"이라고까지 하였다. 이런 발언에 입각한다면, 비록 누군가가 기분 나빠한다고 하더라도, 정신 분석학을 수용하거나 말거나 모두가 현대 심리학의 우산 아래에 설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학문적 정체성이나 유의미성, 차별성은 역사가 아주 깊은 몇몇 학계를 제외한 어느 근대적 학문 체계에서든 보이지 않는 물밑싸움을 벌이고 있으니 일상적인 일이라고 하겠지만, 이것이 학부생들이나 대중들에게 왜곡된 형태로 (내지는 한쪽의 의견만이 반영된 상태로) 전달되는 것은 잠재적인 위험의 소지가 있다. 극단적으로 비관적인 입장에서 말하자면 "정신분석학을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정신분석학에 이해가 부족한 강경한 행동 과학자들이 정신분석학을 공격한다' 고 주장하지만, 한편으로 정신분석학을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과학적 연구에 이해가 부족한 임상가들이 심리학의 근간을 위협하고 있다'[* 예컨대 정신분석학 옹호자들은 그들이 적대하는 그룹이 행동주의 심리학자들"뿐"이라고 믿을 수도 있지만, 그 행동주의자들의 잔칫상을 엎어버린 인지 과학자들과 후대의 신경 과학자들 역시 정신분석학을 의미 있는 과학 연구의 토픽으로 진지하게 다루지 않고 있다는 점까지는 반영하지 않고 있는 듯 보인다. 정신분석학의 논리 체계에 대한 인식이 프로이트에서 멈춰 버리면 곤란하듯이, 여타 심리학 분과들의 논리 체계에 대한 인식이 [[스키너]]에 멈춰서도 곤란하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식의 설명도 가능해진다. 하지만 이와 같은 구도에서 보듯이 상대방을 향한 칼끝이 고스란히 자신에게 되돌아올 수 있는 적대적 관계에서는 양측에 건설적인 협업이 형성되기 어렵다. 마침 [[심리학의 오해]] 문서에서도 지적하고 있지만, 정신분석학에 대한 대립각을 세우는 것은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의 이미지를 정립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인정 투쟁'''의 성격을 갖는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심리학 연구실에서 실험을 하는 연구자들에게 뭔가를 과학적 방법을 통해 실증해 보인다는 것이 심리학을 위해 얼마나 중추적이고 근본적인 논리인지는 뼛속 깊이 체감할 수 있다. 고양이의 머리를 붙잡아두고 시각 체계를 연구하거나 쥐의 신경 발화율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에게 정신분석학은 그야말로 천체 물리학자가 바라보는 별자리 운명론 같을 수 있다. 이들의 활동을 고려하면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이라는 슬로건을 인정하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한편 필드에서 직접 뛰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그들의 생애사와 발달에 대해 수많은 데이터를 수집하는 임상가들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한계를 절감하고 있다. 과학이라는 영역에서는 뭐라고 설명할 수조차 없는 이들의 갈증을 풀어주는 소중한 접근 방법 중 하나가 바로 현대적으로 개선되어 온 정신분석학이라는 접근인 것이다. 이들의 활동을 고려하면 심리학의 정체성은 과학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과학 그 이상의 무언가이다. 잠시 생각해 볼 만한 점은 정신분석학이 향후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심리학이 본질적으로 과학성과 기술성 모두를 포괄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과학과 기술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하는 것이 쉽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임상적 장면은 과학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치료적 독특성이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fMRI를 비롯한 첨단 신경 영상 장비들의 과학적 발견들에 대해서는 두 손 들어 환영한다면, 눈돌아가는 뇌 사진들에 정신이 팔려서 치료 현장에만 존재하는 계량화할 수 없는 "어떤 것" 을 놓치게 될 위험이 있다. 이는 비단 [[환원주의]]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특히나 신경 과학자들 본인들부터 뉴로이미징이라는 방법론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을 느끼고 있는 2010년대 중반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더욱 중요한 사안이다. 이는 비단 정신분석학뿐만 아니라 심리학의 숱한 분과들에서 피해갈 수 없는 화두이기도 하다.[* 예컨대 정신분석학 긍정론자들에게 이유모를 공격을 받는 [[사회심리학]]계를 예로 들면, 한때는 이들도 부두교 과학(voodoo science)이라는 욕까지 먹어가며 사회 신경 과학 등의 통섭론에 열을 올렸었지만, 십수 년이 지난 뒤에는 오히려 뇌 기반 연구에 좀 시니컬해진 연구자들도 많다.] 이런 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미 머리를 쥐어뜯고 있기에, [[신경과학]]과 같은 소위 '경성 과학적 접근'에 대한 전반적인 심리학계의 분위기는 2000년대 초엽에 비교하면 상당히 침착해진 상태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