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약용 (문단 편집) === 가족 === 정약용이 다른 형제들에 비해 월등하게 유명하긴 하지만, 사실 정약용의 형제는 모두가 여러 방면에서 뛰어나다. 아예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이라는 책이 있을 정도. 맏이인 정약현은 다른 세 동생들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진다. 그래도 1795년 식년시 진사 3등으로 급제한 어엿한 과거 합격자(정작 벼슬은 못 했다). 아버지 정재원의 상을 치를 때 마당에 누대를 짓고, 상복을 벗자 그 누대를 망하루(望荷樓)라 이름 붙이고[* 정재원의 묘가 하담(荷潭)에 있으니, 하담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매일 아침 올라 아버지 묘소를 바라봤다는 효자다. 자기 집을 수오재(守吾齋)라고 이름붙였는데, 정약용은 이를 떠올리며 "나는 형처럼 나를 지키지 못하고 살았다"라고 자책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이 사람의 사위가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조정의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를 불러온 [[황사영]]이다. 황사영의 아내 정 마리아[* '정명련'이라고도 하고, '정난주'라고도 한다.]는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황사영과 정 마리아의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에서 자랐다. 다만 정약현 본인은 형제들 중 유일하게 천주교를 받아들이지 않아 체포되지 않고 처벌을 받지 않았다. 천주교 때문에 어쨌거나 풍비박산나게 된 집안을 지키다가[* 구전되는 말로는 정약종의 시신을 집으로 돌려보내려 싣고 강을 건너오던 배를 강가에서 막아섰다고 한다.] 1821년 전염병으로 생을 마쳤다.[* 정약현의 아들 정학수도 아버지 뜻에 따라 천주교를 반대하여 처벌받지 않았지만 20세 나이에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정약현 사망 3년 전에 해배된 정약용이 묘지명을 지어줬다. 둘째인 [[정약전]]은 [[흑산도]] 유배 생활 중 섬 주민들과 가깝게 지내며 책 하나를 쓰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자산어보]]이다. 또 [[우이도]]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는 홍어상인 [[문순득]]을 만나게 되는데 그에게서 풍랑을 만나 일본, 필리핀까지 표류하다 흑산도까지 돌아온 이야기를 듣고 이 체험담을 날짜별로 정리한 [[표해록]], 「표해시말(漂海始末)」을 썼다. 이 내용은 정약용에게도 전해졌고 이에 정약용은 제자 이강회(李綱會)를 우이도로 보내 문순득을 만나게 해, 「운곡선설(雲谷船說)」을 집필하게 한다. 두 형제는 강진과 흑산도로 제자를 보내면서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정약전이 목민심서의 초고를 봐주기도 하였으며 후에 정약용은 '''"약전 형님이 나보다 낫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정약전의 외아들이 혼인 후 자식없이 죽자 흑산도에서 맞은 첩의 아들을 양자로 올리라고 조언하는 등 모든 것을 나누었다. 하지만 정약전은 정약용의 유배가 끝나고도 유배가 풀리지 않아 우이도에서 생을 마감했다. 정약용은 둘째 형인 정약전에게 학문과 정신적인 면 모두 크게 의지하였으나 나주에서 각 유배지로 헤어진 이후 임종시까지 결국 만나지 못하였다. 셋째인 [[정약종]]은 [[한국 천주교]]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된다.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 본래 [[도교]]에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던 그는 형제들 중에 가장 늦게 [[천주교]]를 받아들였으나,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신앙 생활을 했다. [[한국 천주교]] 최초의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明道會)의 회장이었고, [[신유박해]] 당시 약전, 약용과 달리 끝까지 배교하지 않아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와 함께 [[순교]]하였다. 그 [[순교]] 과정이 놀라운데, 설화에 따르면 처형 때 하늘을 보고 죽겠다며 누워서(!) [[망나니]]의 칼을 받았고, 첫 칼질이 잘못되어 목이 반만 잘리자 일어 앉아서 [[성호]]를 긋고 다시 칼을 받아 처형되었다고.[* 출처 잡지경향 1999년 3월호.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순교를 소재로 만들어진 [[https://www.youtube.com/watch?v=9z3RyBzOJAY|생활성가]]도 있다. 다만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데, 조선시대 사형 자체가 저런 식으로 사형수가 움직일 수 없다. [[참수형]] 참조.]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124위 복자]]로 시복되어 있다. [[정약종]]의 가족은 특히 신실한 집안이었는지 거의 몰살당했다. 차남 [[정하상]]은 한국 최초의 [[신부(종교)|신부]]가 되기 위해 30년 동안 동정을 지켰지만, 1839년 기해 박해 때 [[순교]]하며 [[한국 103위 순교성인]]으로 시성됐다. 장남인 정철상도 [[순교자]]고, 약종의 후처 유조이 체칠리아[* [[한국 천주교]]에서는 유소사 체칠리아로 부른다. 召史의 훈음과 독음의 차이.]와 딸 정정혜 역시 [[한국 103위 순교성인]]이다. 장남 정철상도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124위 복자]]로 시복되었고, 시성 심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서자인지라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복동생 정약횡도 유명한 의원으로 이름을 날렸다. 우애도 좋았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미루어 보건대 다산의 아버지인 정재원은 '''자식 농사에서 역사상 보기드문 성공 사례'''로 평가받기에 손색이 없다. 아들들이 모두 [[엄친아]]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막내(적자 중에서. 정약횡을 포함하면 넷째) 정약용은 역사에 이름을 남겼고 손자들까지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니. 친인척 관계는 다음과 같다. 정조 대 명재상 [[채제공]]과 정약용 형제는 사돈 어른과 사돈 총각 관계이다. 정약용이 어머니를 여읜 후 정약용 형제를 키운 서모 김씨의 큰딸이 채제공의 유일한 혈육이자 서자인 채홍근과 결혼했다. 외가쪽으로 정약용의 어머니인 윤씨는 자화상으로 유명한 윤두서의 손녀이다. 즉 정약용은 윤두서의 외증손이며 해남 윤씨 가문은 정약용의 외가가 된다. 더 올라가면 [[윤선도]]가 윤두서의 증조부이므로 이쪽으로도 연결이 된다. [[진산 사건]]의 [[윤지충]] 바오로 역시 정약용의 외사촌. 정약용은 6남 3녀를 두었는데 그중 5명은 천연두로 요절해 최종적으로는 2남 1녀가 살아남았다. 강진에서 유배하던 중 두 아들에게 보낸 [[하피첩]]이 유명하며 차남 정학유는 역사학적으로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 '농사 지침 가사'인 [[농가월령가]]를 저술했다.[* 다만 정약용과는 달리 술을 좋아해서 정약용이 편지로 "술 좀 그만 좋아해라!" 라며 타박할 정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