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업원 (문단 편집) == 역사 == 정업원(淨業院)은 고려 때부터 왕실 또는 권문세가 여인이 출가해 살던 개경에 있던 절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1164년([[의종(고려)|고려 의종]] 18) 의종이 정업원에 행차한 기록, 원나라(元) 침략으로 수도를 강화도로 천도 후 1252년(고종 38)에는 박훤(朴暄)의 집을 정업원으로 사용한 기록, 개경 환도 후 정업원도 다시 개경으로 이전한 기록, 충숙왕 때 남편 이집(李緝)을 살해한 반씨(潘氏)를 정업원에 있게 한 기록, 고려 말에는 비구니 묘장(妙藏)이 주지라는 기록이 있어 그 전부터 정업원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사 기록만 보면 고려시대 정업원은 왕조가 관리하는 사찰로 지배계급 출신의 비구니들이 살던 절로 추정된다. 특히 충숙왕 때 남편 이집(李緝)을 살해한 부인 반씨(潘氏)를 정업원에 머물게 한 이유를 살펴보면 당시 고려는 원의 지배를 받는 국가였고, 반씨(潘氏) 부인은 원의 세조가 아낀 반부(潘阜, 1230~?)의 후손으로 형벌의 제제가 쉽지 않는 점을 생각하면 고려 정업원은 여자가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업(業)을 참회하는 사찰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쿠테타로 집권한 이성계는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며 고려왕권의 주요 왕족과 귀족들을 인질로 데려온다. 이 중에는 남편을 잃고 승려가 된 왕족의 여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살게 한 곳이 정업원으로 추정된다. 초기 조선의 정업원은 건국의 안정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지만 수도 이전에 따른 중요 공사에 밀리면서 신축이 아닌 기존 사찰을 정업원으로 이용한다. 정업원에 대한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은 창경궁 서쪽 응봉(鷹峰)에 있었다는 기록인데 응봉(鷹峰)은 고유명사가 아닌 산 정상을 뜻하는 말로 조선 개국 당시 창경궁 서쪽 응봉에 있던 절은 747년에 진표가 창건한 정토사(淨土寺)가 있다. 정토사는 1399년 (정종 원년)에 조선 건국공신이자 최초 국사(國師)였던 무학(無學) 자초(自超)의 지시로 함허가 중창한 사찰로 1413년(태종 13)에는 상왕인 정종(조선 2대 왕)이 요양을 위해 절에 머문 기록, 세조 때 의숙옹주의 묘가 백련산 밑에 있어 이 절을 재궁으로 정하고 백련사로 이름을 고친 기록, 정업원과 백련사의 폐사가 비슷한 점, 조선 중기까지 존재한 정업원을 기록한 한양 지도의 부재 등을 고려하면 현재 서대문 홍은동에 소재한 대한불교천태종 소속 백련사가 최초의 정업원으로 사용된 사찰로 추정된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창덕궁]] 후원 뒤편에 존재하고 있었는데, [[숭유억불]] 정책이 강화되는 [[태종(조선)|태종]]년간부터 궁궐 내에 [[불교]]와 여성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을 [[극혐]]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정업원을 폐지시키자는 논의가 계속 제기되었다. 결국 1448년(세종 30) [[세종(조선)|세종]]대에 이르러 내불당(內佛堂) 건립을 앞두고 정업원이 혁파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다 1457년([[세조(조선)|세조]] 3)에 당시 왕이었던 세조의 명에 따라 원래 있던 자리에 정업원이 다시 부활했다. 다만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정업원의 부활은 불교의 흥성을 위해서라기보다는 혼자가 된 여성들과 [[장애인]]들의 궁핍한 삶을 구제하고자 시행하겠다는 점을 주로 표방했다. >"과부(寡婦)와 외로운 여자들이 대개 머리를 깎고 [[비구니|여승]]이 되는데, 여승이란 실로 궁박(窮迫)한 무리들이다. 그래서 내가 다시 정업원(淨業院) 을 세우고 이곳에 모여 살게 하여 이들을 구제하려고 한다. 또 다리를 절어서 보행할 수 없는 자도 지극히 궁하고 불쌍한 자이다. [[삼각산]](三角山)의 들에서 살며 걸식(乞食)하는 의뢰(依賴)할 곳 없는 기민(飢民)들은 어찌 그 생명을 이어 가겠는가? 내 뜻을 몸받아 포치(布置)하도록 하라."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309008_002|세조실록 9권, 세조 3년 9월 8일 기사 2번째기사]] 이후 세조는 정업원에 전지 100결을 내렸고, 매달 멥쌀(粳米) 7석을 정업원에 주게 했다. 그리고 정업원 소속 [[노비]]에게는 잡역을 모두 면제토록 했다. 하지만 [[성종(조선)|성종]]대에 사림들의 정계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정업원은 유학자 관료들의 주요 까임 대상이 되었다. 결국 1489년(성종 20)에는 [[인수대비]]가 정업원으로 보낸 [[불상]]을 유생 이벽 등이 가져다 태워버리고, 임금인 성종이 [[반달리즘]]을 벌인 유학자들을 두둔하며 어머니 인수대비를 막아서는 일까지 발생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2005011_004|성종실록 228권, 성종 20년 5월 11일 무진 4번째기사]] 대놓고 왕실의 최고 어른이자 왕의 어머니가 수호하는 [[불상과 절(불교)|절]]까지 불태우는 시대가 오게 된 것이다. 결국 1504년(연산군 10) 7월 29일 [[연산군]]이 "정업원과 안암사(安庵寺)의 여승들을 국가에서 몰수한 한치형(韓致亨)의 집으로 강제로 이동시키라"고 명하면서 정업원을 철폐했다. 이로써 세조가 중창한 정업원은 명맥이 끊어졌다. 이후 [[중종(조선)|중종]]이 1506년(중종 1) 선비들을 정업원에서 사가독서하게 했고 독서당(讀書堂)으로 사용하다가 독서당을 두모포(頭毛浦, 현 서울 성동구 옥수동)로 옮긴 1517년(중종 12) 이후로는 완전히 폐사지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