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업원 (문단 편집) == [[정순왕후(조선 단종)|정순왕후]]와의 관계 == 정업원은 오랜 세월동안 조선 왕실 여성들의 보호처였다. 조선 건국 후 [[이제현]](李齊賢)의 딸이자 [[공민왕]]비인 혜비(惠妃)가 말년에 정업원에서 지냈고, [[1차 왕자의 난]] 뒤에 세자 방석의 누나인 [[경순공주]]도 이곳에 머물렀다. 조선 [[단종(조선)|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조선 단종)|정순왕후]]도 [[계유정난]] 이후 이 정업원에서 지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다. >단종이 [[강원도]] [[영월군|영월]]로 유배될 때, 동대문 밖에서 단종과 생이별한 정순왕후는 지금의 숭인동 청룡사 터에 있던 작은 초가집에 시녀 3명과 함께 눌러 앉는다. 이곳이 바로 정업원 옛터다. 이때 송씨의 나이 18세였으며, 이때부터 그녀는 날마다 남동쪽 가까이에 있는 바위산에 올라 단종이 유배된 영월 쪽을 바라보며 슬픔과 그리움의 눈물을 흘리며 애절한 삶을 살았다. 그녀가 죽은 82세까지 64년의 길고 긴 세월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산에 올라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 다만 실제 [[조선왕조실록]]이 완역된 후 확인해본 결과, 실제 정업원은 동대문 밖에 아니라 궁궐 내에 있었다. 이는 조선 [[영조]] 47년(1771), 지금의 자리인 동대문 밖 연미동 청룡사를 영조가 과거 정업원 터라고 보고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고 친필로 써 정순왕후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기 때문인데, 이는 제대로 잘못된 정보였다. 훗날 [[경혜공주 분재기]]도 발견되면서 당시 관련 여성들이 궁궐 내에서 공주직을 유지하며 지냈음이 공식적으로 재확인되었다. 영조가 직접 친필로 세운 정업원구기는 현재 서울특별시 시도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 다만 관리상태가 엉망이라 이를 지적한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30643|오마이뉴스 : 단종 비의 한이 서린 정업원 옛 터]] 주변에는 야인이 된 [[정순왕후(조선 단종)|정순왕후]]가 매일 바위산에 올라 울면서 단종의 넋을 기린 장소라는 동망봉도 함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